집안(集安)에 있는 무덤떼 7천여기. 이 중에는 거의 평지화 돼 가고 있는 무덤들이 많지만 과거의 찬란했던 영화를 상징이라도 하듯 아직 위용을 갖추고 있는 왕릉이나 귀족들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들도 상당수다.
이들은 대부분 경주의 왕릉급 무덤보다 큰 고분들. 비교적 큰 무덤에 속하는 신라태종 무열왕릉의 높이가 11m, 직경 30m인데 비해 통구고분군(집안 지역 무덤떼의총칭)에서 가장 큰 무덤인 천추묘는 가로 80m, 세로 85m에 현재 남아있는 높이만15m이다. 현지 주민들은 60년대만 하더라도 거의 20m에 달했다고 말했다.
천추묘는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라는 문자가 새겨진 명문(銘文) 기와 벽돌이 발견된데서 이름 붙여졌다. 이 탁본과 광개토대왕릉에서 나온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탁본은 집안박물관과 광개토대왕비 유물전시장에서 판매하는데 관광객들의 최고 인기 상품 중 하나다.
이 무덤은 18대 고국양왕의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고국양왕은 소수림왕 때 들여온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서진정책을 활발히 펼쳤던 왕.고구려 고분들 중 피장자가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무덤의 크기와 발견된 유물 등을 통해 추론만 할 수 있을 뿐이나 이것도 전문가들마다 의견이 엇갈린다고구려 전문가 김용만씨는 고구려를 가장 실패한 역사로 규정한다. 그렇게 찬란한 문명을 구가했으면서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한탄에서다.
이런 가운데서도 중국 역사학계는 태왕릉이 광개토대왕릉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한다. 태왕릉은 중국에 있는 고구려 고분중 두번째로 큰 묘. 광개토대왕비에서 200여m 떨어진 거리에 나지막한 야산처럼 우뚝 솟아 있다.
고구려 유적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장군총의 5배이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태왕릉이 광개토대왕릉이라는 결정적 증거는 이곳에서 나온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이라는 기와조각 때문이다. '태왕릉이여 산악처럼 견고하소서'라는 뜻이다.
태왕은 광개토대왕 이외에는 없기 때문. 광개토대왕비도 비에 기록된 태왕이라는 단어를 근거로 나왔다.
묘실 내부에 들어서면 두개의 관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묘실의 규모는 고분의 크기에 비해 아주 작다. 이곳이 광개토대왕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묘실을 근거로 든다. 기골이 장대했던 광개토대왕을 모시기에는 관대가 너무 작다는 것. 취재진이 무덤 내부에 들어가 확인한 실제 관대는 1.6m 정도였다.
태왕릉은 광개토대왕이 직접 설계·건설을 지휘했다. 대왕은 39세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당시 고구려는 결혼하면 바로 수의를 만들어 놓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왕이 자신의 묘지를 만든다고 이상할 것은 없다.
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대왕은 412년에 사망했고 2년후인 414년 이장했다'고 광개토대왕비에 기록했다. 이로 미뤄볼 때 가묘를 만들었다가 이장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규모면에서 세번째인 서대묘는 통구고분군의 서쪽에서 가장 큰 고분. 길이 60m, 너비 40m인 이 고분은 대대적으로 파헤쳐진 흔적 때문에 대형 고분이 2개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모용선비는 고구려를 침입, 16대 고국원왕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하자 부친인 미천왕의 무덤을 도굴, 시신을 가져갔다. 학자들은 서대묘를 미천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집안 지역 대형 고분들의 특징은 대부분 묘실이 서향이라는 점.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 정도가 서남향이다. 광개토대왕까지는 분묘의 서향 개념이 지배적이었다가 5세기 중엽~5세기말까지는 서남향, 평양 수도 시대에는 남향이 굳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불행히도 고구려 고분 가운데 도굴이 안된 것은 하나도 없다. 삼국지(지은이 진수·우리가 흔히 아는 삼국지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는 "후장(厚葬)이 성하여 생전에 쓰던 금은보화를 전부 죽은 사람을 안장하는데 쓴다"는 고구려 묘장 풍속에 관한 기록이 있다. 무차별적인 도굴도 이 때문에 일어났으리라.
외곽만이라도 보존해온 것은 고구려인들의 뛰어난 건축술 때문. 구조가 치밀하고 견고하며 돌층계도 서로 엊물려 있기 때문에 조직적이 아니면 한두사람의 힘만으로는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여기다 이용된 석재가 여러명의 장정들이 동원돼도 쉽게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암석이었기에 장구한 세월을 버텨냈다.
--▨9대 고국천왕·10대 산상왕
고국천왕(179~197년)은 국상 을파소를 등용, 진대법을 실시한 왕으로 잘 알져져 있다. 진대법은 백성들이 굶주리는 봄에 나라에서 식량을 빌려 주었다가 추수 때 되돌려 받는 제도. 당시 백성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고국천왕은 유력 부족에게 가 있던 병권을 돌려받는 등 왕권을 강화했다.
산상왕(197~227년)은 고국천왕의 둘째 아우. 고국천왕의 부인인 우씨왕후의 도움으로 왕이 된다. 즉위 후 우씨왕후와 결혼한다. 형사취수(兄死娶嫂)제의 풍습을 보여주는 대목. 고국천왕의 첫째 동생인 발기는 여기에 반발해 요동 공손도의 도움을 얻어 반란을 꾀해 보지만 환도성에서 맞받아친 동생 연우에게 패배한다. 산상왕은 환도성을 다시 쌓아 방어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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