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조부 '최주형'항일 공적 인정해주오

입력 2000-08-14 14:01:00

"동일인 임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만 있으면 공적은 충분하다고 해 백방으로 쫓아다니며 증빙자료를 모아 확인시켰는데 이제 와서 공적운운 하니 기가 막힙니다"8·15 광복절만 되면 최두진(73·대구시 동구 신암1동 671의 2)씨는 조상에게 큰 죄를 지은 심정이다.

조부 최주형(일명 최중형)장군이 의병대장 신돌석 장군이 지휘하는 의병에 가담, 전투에서 산화했는데도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씨는 그동안 할아버지가 나라를 구하려다 목숨을 바친 항일의병 공적을 인정해 달라고 경주보훈지청과 국가보훈처 등 각계를 찾아 호소했다.

최 장군의 실제 이름은 최중형이었으나 독립운동을 하면서 당시 최주형이라는 이름으로 활약 했다는 것. 결국 이명동인(異名同人)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아 포상을 받지 못했다.

장군의 손자인 최씨는 올해도 조부를 위해 국가보훈처에 포상을 신청했다. 그러나 이번엔 최주형과 최중형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은 입증됐지만 당시 활약상 등 공적 입증 자료 미흡을 이유로 보류됐다. 지난 85년 부터 4차례나 포상신청을 했다가 반려된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래도 허탈한 심정을 가누기 힘들다. 다시 불충분한 공적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병대장 신돌석 장군의 실기외에는 당시 전쟁 참여 사실을 입증할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신돌석 장군 실기에 따르면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가 고향인 최주형 장군(일명 중형)은 당시 영덕군 축산면 복평리에서 신돌석 장군이 창군한 영릉 의병진에 가담했다.

영솔장(領率將)의 중책을 맡은 최장군은 울진, 봉화, 정선, 원주, 제천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고 일월산, 백암산, 대둔산, 동대산 계곡으로 일군을 유도, 기습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밀고 밀리는 전투를 계속 하다가 1907년 6월26일 영덕군 병곡면 아곡전투에서 순국했다. 이때 최 장군의 나이 33세. 최 장군은 최맹종의 아들로 태어나 육척장신으로 용력이 뛰어나고 지략이 비범해 15세때 이미 소년장군으로 불리웠다.

이후 나라 잃은 슬픔에 못견뎌 신돌석 장군이 창군한 영릉 의병진에 가담, 신 장군의 유격전법을 익혔다고 한다. 또한 공적이 인정돼 그 후손들에 의해 경주보훈지청관내인 영덕읍에 최 장군의 순국기념비가 건립되기도 했다.

유족측은 전국의 도서관과 독립기념관 등에 당시의 신문 또는 신돌석 장군의 실록을 찾아 나섰지만 해방후 편찬된 신 장군 실기 외에는 자료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최씨는 "국가보훈처가 동명이인만 확인되면 공적은 충분하다고 해서 동명이인에 필요한 증빙자료를 제출, 이의가 없는 것으로 확인해 놓고 또다시 공적운운하면서 보류했다"며 억울해 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최 장군은 큰 상을 줘야할 인물로 포상심사 과정에 찬반이 팽팽해 공적입증 자료를 더 보충하기 위해 일단 보류했다"고 말했다.

경주·朴埈賢기자 jhpark@imaeil.com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