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옛땅을 가다-5)역사박물관 '집안'

입력 2000-08-07 14:16:00

고구려 제2의 수도였던 국내(國內)성이 있는 집안(集安)은 고분 천국이다. 도시 어디를 가도 무덤떼와 만난다. 우리가 경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왕릉급에서 공동묘지의 조그만 무덤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집안 사람들은 "우리 지역은 '분지(盆地)이자, 분지(墳地)"라고 말한다. 60년대만 해도 이곳에 1만2천여기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7천여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동북아시아 민족 중 무덤의 범위가 가장 크고 많으며 다양하다.

이곳의 무덤은 하도 많아 하해방(下解放), 우산(禹山), 산성하(山城下), 만보정(萬寶汀), 칠성산(七星山), 마선(麻線) 고분군 등 6대 고분군으로 나눈다. 이를 통칭해 통구 고분군이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집안은 '고구려의 자연 박물관'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현재 고구려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는 거의 없다. 있다고 해도 거의 중국 것이거나 중국의 역사관을 차용한 우리 역사서들이다. 그런 면에서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무덤들은 생생한 고구려 역사의 현장인 셈이다.

집안 지역 무덤의 특징은 큰 무덤일수록 평지에 있고 작은 무덤은 산기슭으로 올라간다.

왜 이다지도 많은 고분들을 만들었을까. 이는 무덤이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집안에는 무수한 무덤들이 있는데 압록강 건너 북한 땅에는 하나도 없다. 이로 미뤄 볼 때 고구려인들은 큰 강을 건너 무덤을 만들지는 않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또 무덤은 생활근거지 부근에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인들은 결혼하면 바로 무덤 자리를 마련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구려인들은 죽은 사람도 산 사람처럼 의식주를 행한다고 믿었다. 이는 능묘 위에 건축물을 지었던 흔적이나 묘실을 집 내부처럼 몇 칸씩 만든 것에서 잘 드러난다. 장군총 위에 건물이 있었다는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죽은 사람도 살아 있는 사람과 같이 생활한다고 믿었기에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닌 생활 근거지 주변에 무덤을 만들었으리라.

학자들은 고구려의 무덤을 축조 방식에 따라 적석묘, 방단적석묘, 방단계단식석실묘, 봉토석실묘, 봉토동실묘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불행히도 이 많던 무덤들의 피장자들은 문헌의 기록과 자료 불충분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왕릉이라고 추정되는 무덤은 태왕릉, 장군총, 천추묘, 서대묘, 임강묘, 우산고분군의 3319묘 등이다.

집안에 있는 무덤들은 거의 도굴된 상태다. 근래에 들어와 파헤쳐진 것들이 대다수지만 당시 적군에 의해 도굴된 무덤들도 있다. 16대 고국원왕(331~371년) 때 침략해온 모용선비(후의 전연, 前燕)는 왕의 부친인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가져갔다고 한다.

상당수 학자들은 이 무덤이 서대묘(西大墓)가 아니겠느냐고 추정한다. 서대묘는 통구평야 서쪽에서 가장 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길이 60m, 너비 40m, 무너져 내린 높이가 9m에 달한다. 실제 이 무덤은 파낸 묘실 부분 때문에 앞에서 보면 대형 고분이 2개인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파낸 흔적이 깊고 넓다는 얘기다.

고구려 고분에 있던 거의 전 유물들이 도굴됐기 때문에 남아 있는 유물은 벽화가 유일하다. 고구려 고분중 현재까지 벽화가 발견된 고분은 86기에 이른다. 중국 당국은 벽화가 있거나 보존가치가 있는 고분들은 모두 봉쇄해 일반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유일하게 개방하고 있는 것은 오회분 오호묘. 회분이란 투구 모양을 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 하지만 이 무덤도 벽화 훼손을 막기 위해 2002년부터 폐쇄할 예정이라고 한다.

마선 고분군에는 한데 엉겨붙어 있는 무덤들이 많이 발견된다. 연변(延邊)의 고구려 전문가 김삼씨는 "이는 가족장의 형식이 유행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구려 고분은 현재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60년대 1만2천여개이던 것이 30년이 지나면서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현지 주민들은 돌이 필요하면 고분에서 갖다 쓴다. 심지어 시 당국조차 공사장에 사용하는 돌을 고분에서 충당할 정도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환도산성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산성하 고분군은 그래도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다. 중국 정부가 지난 96년 대대적으로 정비를 했다. 다만 무너져 내린 부분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복원하지 않고 그냥 쌓아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 점이 아쉽다.

▨7대 차대왕·9대 신대왕

고구려 제7대 차대왕(次大王, 146~165)은 전왕이 태조대왕 당시 후한의 유주자사가 이끈 대군을 물리치면서 고구려의 실권자로 떠오른다. 이후 잇단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서 노골적으로 왕위를 탐내자 태조대왕이 왕위를 넘겨준다.

왕이 된 후 자신을 반대한 세력과 태조대왕의 아들까지 죽이는 살육정치를 감행하다가 혁명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차대왕이 죽은 후 숨어 지내던 그의 동생 백고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8대 신대왕(新大王, 165~179)이다. 신대왕은 화합정치를 하고 정적을 포용하는 정치를 펼쳐 백성들의 신망을 얻는다. 후한과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는 등 병법에도 능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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