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장마 끝자락의 간헐적인 장대비가 염천에 풀죽은 일월산 수림에 생기를 주고 있다.
용화리 일월산 구릉, 메말라 가던 골골 계곡물은 금세 소용돌이를 만들고 굽이굽이 반석과 돌무더기를 부딪혀 내리다 자욱한 물안개를 일군다. 한자쯤 자란 고사리의 연녹빛이 물기를 머금어 더욱 청초하다.
아무 말없이 사람들을 받아 안았던 일월산. 일월의 품으로 찾아든 많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바람은 고통받지 않는 평온한 세상. 차별이 없는 새세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우련전. 200여년전 모진 박해를 피해 일월산 자락으로 몸을 숨겨 공동 신앙생활을 했던 천주교인들의 터전이다. 초입에 영양과 봉화를 잇는 국도 31호선이 개설되고 그 허리춤으로 영양터널과 봉화터널이 뚫리면서 이젠 첩첩산중이라는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영양읍내에서 40여분 거리다. 영양터널을 빠져나와 우측 계곡을 따라 돌아들면 울창한 낙엽송림과 마주한 넓은 화전이 펼쳐진다. 우련전이다. 한국 천주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지요, 애틋한 순교사를 남긴 곳이다.
200여년전인 1801년 조정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천주교도들의 삶이 녹녹히 스민 자리. 인근 산촌민을 통해 우련전의 형성과 집단 교우촌에 대한 내력을 어슴푸레 하게나마 전해들을 수 있었다. 김성문(69·일월면 용화리)씨는 "그 당시에는 높은 산으로 막혀있어 바깥 사람들과의 통행이 없었고, 나물캐는 약초꾼과 포수들이 산속 신앙생활을 외부로 전했다는 얘기가 남아 있다"고 했다.
"지금은 도회지 사람의 별장 건물이 들어선 우련전 골짝 심처에 당시 교회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하지만 교회라야 토굴이나 움막 행색이였겠지"
천주교 안동교구청에서 발간한 학생 하계연수 자료에 당시 피신온 교도들의 신앙생활이 일부 전해지고 있다.
한국최초의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의 종조부 김종한 안드레아가 신유년의 처절한 박해를 피해 30여명의 교도들과 함께 이곳으로 들어왔다 한다.
우련전에 터를 잡은 뒤 이들은 기도와 성서읽기에 전념했고 동틀녘이면 어김없이 기도를 올렸다. 기도는 점심과 저녁에도 계속됐다. 낮에는 집단으로 화전을 일구고 밤에는 교리공부에 힘썼다.
기도 도구랄것도 없이 손엔 묵주가 고작이었고 제단엔 양초 대신 호롱불이 차지했다. 나무토막으로 십자가상을 만들어 신앙생활을 영글게 했다 한다.
영양성당 초창기 신도인 이낙현(55·이디오니시오·영양읍 서부리)씨는"당시 교우촌을 형성했던 신도들은 거친 깡조밥과 소금으로 생활하는 검소함을 실천했다고 전해들었다"면서 "그들의 공동체 신앙생활이 지금의 나눔과 섬김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인근 화전민들에게 일심한 기도와 모범생활로 포교해 교우촌을 넓혀가고 고난속에서도 사순절의 극기생활과 매일매일의 대제를 엄격히 지켜 나갔다고 전해진다.
당시 천주교도들이 찾아들기 전부터 산촌민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 전해오는데 대부분 지금의 우련전 들머리의 갈산초등학교 우련전 분교에서 3km정도 내려가 만날 수 있는 폐석회광산 주변 계곡이 화전민촌이었다 한다.
지금도 우련전 곳곳에 천주교도들이 제단으로 사용한 듯한 석축이 남아있다. 화전의 둑을 만든 석축과는 다른 작은 형태다.
일월산 자락에 남아있는 또 한곳의 교우촌. 봉화군 소천면 남회룡리와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와 맞닿은 곧은정이다.
낙엽송림속에 남아있는 집터들. 화전의 경계를 두른 돌무더기. 이끼와 나뭇잎에 덮힌 샘. 구들장으로 보이는 널찍한 돌들. 이제는 모두 사라진 화전민과 교인들의 흔적이다.
이곳 곧은정에도 신유년 박해를 피해 천주교도들이 숨어들어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다. 김희성 프란치스꼬를 비롯해 김복수 김광복 등 20여명의 성도들이었다.
일월산 자락으로 찾아들었던 천주교도들은 1784년 이승훈 이벽 등에 의해 한양에 첫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염원하며 세습화된 차별적 신분제도의 불평등을 없애고자 했던 이들이다.
이들의 신앙적 신념은 기존 사회질서의 기득권층으로부터 위험한 사상으로 간주되면서 당파싸움의 소용돌이속에 엄청난 박해를 받아야 했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을 시작으로 1791년 신해박해(진산사건), 1794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입국 선교활동 사건 등을 거치며 계속된 박해는 1801년 신유년에 들면서 극에 달했다.
조정의 사상전파 금지와 신도들의 체포, 지도부의 참수가 이어지면서 천주교도들은 떠도는 방랑생활을 피할 수가 없었다.
처참한 박해가 끝날 즈음 겨우 살아남은 한양, 경기, 충청 일대의 교인들은 전답과 집을 버리고 영남의 깊은 산골로 피행했다.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며 공동 신앙생활로 일월산 교우촌을 형성한 것이다.
교우촌의 정확한 장소와 그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선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오지 않는다. 이조실록(李朝實錄)과 일성록의 기록에서 전하는 박해사로 교우촌 규모와 신도 수를 더듬어 볼뿐이다.
영남교회사연구소 마백락(끌레멘스)소장은 "1814년 대홍수로 굶주림이 극에 달했을 때 전진수라는 배교자의 밀고로 1815년 을해년 대박해가 시작됐다"면서 "우련전과 곧은정, 수비 갈전마을, 석보 머루산, 청송 노래산 일대 교우촌 신도들도 이때 관군에 잡혀 경주와 안동으로 압송됐다"고 순교사에서 전하고 있다.
이때 체포된 신자만도 100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일부는 고문에 못이겨 배교(背敎)하고 어떤이들은 옥살이의 고통으로 숨을 거뒀다 한다.
우련전의 김종한 안드레아와 곧은정 김희성 프란치스꼬를 비롯 7명의 신도들은 대구 경상감영으로 이송돼 이듬해인 1816년 11월 1일에 관덕정에서 참수, 순교했다고 전한다.
모진 박해를 피해 일월의 품에서 14년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외교인들을 감동시킨 나눔과 섬김의 생활사는 200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천주교인들은 물론 일월산 주변 세인(世人)들에게까지도 순결한 영혼을 가꾸는 진솔하고 값진 삶의 표상으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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