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옛땅을 가다-집안시 환도산성

입력 2000-07-31 14:14:00

국내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환도(丸都)산성. 국내성이 왕과 귀족들이 생활하는 화려한 평지성이었다면 환도산성은 전시에 사용하는 산성, 최후 방어성이었다. 험준한 산악에 자리잡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해발 676m 환도산 주봉에 자리잡은 이 성은 집안(集安) 시내에서 서북쪽 4km 지점에 입구인 남문이 있다. 총둘레 6천915m. 규모로 볼 때 평양의 대성산성, 요녕성 봉성(鳳城)의 봉황(鳳凰)산성과 더불어 고구려 3대 산성으로 꼽힌다.

이 성의 동·서·북 3면 밖은 심한 낭떠러지. 성안에서 주봉으로 오르는 길도 경사가 30도 이상이다. 젊은이들도 헉헉거리며 겨우 오를 수 있는 천연 요새가 그런 곳에 자리잡았다. 남문을 통하지 않고는 공격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경구가 이곳에서 잘 증명된다. 동천왕 20년(246년).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침입해오자 고구려는 남쪽 방어에 전력한다. 다른 곳으로는 적이 들어오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관구검은 이를 역이용, 남문을 통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수비가 허술한 서벽을 넘어 성을 함락했다.

환도성은 국내성과 함께 정변의 무대로 등장한다. 197년 고국천왕이 사망하자 그의 두 동생 사이에 벌이진 왕위 쟁탈전은 고구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변의 하나로 꼽힌다.

형인 발기(發岐)가 요동의 공손도(公孫度)를 끌어 들여 국내성을 함락하지만 환도성에서 전열을 정비한 둘째인 연우(延優)가 고국천왕 부인인 우씨왕후의 도움을 받아 이를 물리친다. 연우가 10대 산상왕이다.

환도산성은 342년 모용선비의 진공으로 국내성과 함께 함락되며 철저히 파괴되고 이후 성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판단한다.

남문은 흔적도 없이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안내인의 설명에 따라 이곳이 남문인 모양이구나 하는 정도였다.

소·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음마지는 남문에서 30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직경 5m정도 되는 이 저수지는 지금도 물이 솟고 있다. 이 연못이 적을 물리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28년 쳐들어온 한나라 군사가 성에 물이 없을 것으로 판단, 겹겹이 포위하고 항복을 기다리자 고구려는 잉어를 잡아 물풀(水草)로 싸서 한나라 군사에게 갖다 준다. 적장은 성에 물이 풍부해 쉽게 함락 할 수 없겠다고 보고 물러났다.

산성 근처에 사는 현지 주민들은 산성 안에서 유물들을 주워다가 판다. 한달에 5,6개만 팔면 노동자 수입(월 300~400위안, 1위안=140원)보다 낫다.

박물관 근처 식당에서는 왕이 마시던 샘물에서 떠온 것이라며 생수 한병에 10위안씩 받는다. 다른 곳에서 생수 한병에 3~5위안인 것을 감안하면 중국인들이 고구려 유적을 빌미로 벌어먹는 돈이 엄청나다.

1천500평 정도 되는 궁전터는 크게 3개의 계단식 밭으로 나뉘져 있다. 지금도 밭갈이를 할 때마다 기왓장들이 쏟아진다. 육안으로도 깨어진 기와조각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이곳이 궁궐터임을 알수 있다.

국보급으로 지정해놓고도 전혀 보호가 안되는 것은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왕궁터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밭을 일구고 거름을 흩어놓은 것을 보니 여유 없는 중국인들이 고구려 역사를 보는 인식이 이 정도인가 싶다. 이런데도 우리 정부는 중국의 눈치 때문에 고구려 유적 보호는 입도 벙긋 못한다.

성벽이 남아 있다는 주봉으로 가는 길은 너무 힘들다. 경사가 심하고 등산로도 제대로 정비가 안됐다. 입장료(외국인 1인당 3달러) 받아서 무엇에 쓰는지.

북문 정상. 짖궂게 내리던 비도 그치고 안개가 걷히면서 집안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동쪽과 서쪽은 없어져 버렸지만 북쪽 성벽은 완벽하게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보존이 잘 되고 있는 이유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기 때문. 성벽에 파르스레 남아 있는 이끼와 들풀들은 태고의 신비처럼 느껴졌다.

이 높은 곳에 성을 쌓기 위해 백성들은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그냥 올라오기도 힘든데 돌을 운반한 사람들의 수고로움이 가슴에 와 닿는다. 오랑캐로부터 내 가족과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리라.

성을 볼 때마다 가슴이 쿵쾅거린다. 설렘이 있다. 이렇게 조상들의 유물을 직접 현장에서 확인한다는게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5대 모본왕·6대 태조대왕

고구려 제4대 왕은 민중왕(44~48년). 이 때의 역사적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5대 모본왕(48~53년)은 3대 대무신왕의 아들. 대단한 폭군이었으며 신하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에선 성군이었으나 쿠테타에 의해 왕위를 계승한 태조대왕 추종 세력들에 의해 악의적으로 평가됐다는 학설도 있다.

고구려는 6대 태조대왕(53~146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주변 제국들의 통합을 이루게 된다. 동옥저 합병이 대표적인 예. 태조대왕은 눈을 뜬 채 태어났으며 장성해서는 용맹해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후한서에 기록돼 있다. 중국인의 관점에서도 주변 제국에 위용을 떨친 왕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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