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의 산촌을 찾아나서 다다른 오리골 중턱. 장마가 또다시 북상해 한차례 소낙비를 뿌린다. 오후내내 하늘은 심통을 부리고 있다. 겹겹의 먹구름이 장대비를 쏟아 붓고 휑하니 사라지면 또 한무리가 이내 하늘을 뒤덮는다.
일월산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았을까. 무엇때문에 이토록 골깊은 산중에 삶을 기대어야 했을까…. 너무 골똘해 앞을 보지않고 걷다 돌부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산촌의 이름은 정감이 넘친다. 너무 재미있기도 하다. '샘물내기·노루모기·칡밭모기·탑쟁이·찰당골…' 땅과 마을모양 생김대로 이름지어 불렀다.
영양쪽 일월산에는 200여년전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해방전후 산촌민이 가장 많을 때는 25개 마을에 500∼600여명이 둥지를 틀었다고.
정감있는 마을 이름과는 달리 이곳에 찾아든 이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이었다. 찢어지는 가난에 연명 하기 위해, 갖은 난리통을 피하기 위해 뭍세상을 버린 민초들이었다. 은둔자였다. 간혹 일월산의 영험을 좇아와 섞인 사람도 있었다.
영양군 일월면소재지를 지나 국도와 산길로 30여분. 일월산 오리골 골짝.
일월산 동서릉 자락을 따라 깊고 넓게 팬 오리골 골짝을 들어서는, 좁은 비포장길 끝의 '노루모기'마을.
골짝이지만 들이 제법 넓다. 마을을 들어서는 돌길옆으로 고추밭과 콩밭이 이어졌다. 골짝 작은 재를 넘자 허물어진 흙집이 마을 곳곳에 서있다. 문짝이 떨어지고 흙벽에 구멍이 뚫려 쾡한 모습이다.
증조부때부터 이 곳에서 살아왔다는 김기일(61)씨. 증조부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알지 못한다.
대략 200여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말은 들었다 한다. 골짝이 넓어 화전농의 터전으론 적격이란다. 달리던 새끼노루가 어미를 돌아보는 주장고모형(走獐顧母形)형상이라 노루모기라 이름지어 졌다한다.
이곳에는 정말 노루(고라니)가 많다. 사람을 겁내지 않는 이곳 노루들은 시시때때로 민가 코앞까지 내려와 머물다 간다고 한다. 마을 계곡주변 곳곳에 물 마시러 내려온 노루들의 배설물이 쉽게 눈에 띈다.
"한국전쟁 전만해도 이 마을에는 50여농가가 있었다"는 김씨는 "전쟁통에 마을이 쑥대밭이 됐으며, 많은 이들이 인민군에게 죽음을 당했고 자신도 당시 장인과 백부를 한꺼번에 잃었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국군과 경찰들도 야속한 짓을 하긴 마찬가지. 간신히 목숨을 지켰던 사람들을 인민군의 잔당 혹은 빨치산으로 몰아 마을에 불을 지르고 내쫓았다.
온 마을이 시커먼 잿더미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2년이 지나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와 진흙을 빚어 집을 짓고 산게 20여농가. 이제는 김씨를 포함 3농가만 살고 있다.
박병득(78)할아버지. 30여년전 산촌민들이 떠나기 시작하던 시절, 이들이 버리고 간 땅을 찾아 예천에서 이곳으로 들어왔다. 박씨 할아버지는 영양읍내에 자식들이 살고 있으나 뼈속까지 베인 처절한 삶의 애증과 함께 살다 미리 저세상으로 떠난 아내생각 때문에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85년까지만 해도 찻길이 없었다"는 박씨는 "밭고랑 사이로 산촌민들이 직접 삽과 괭이로 길을 뚫었다"고 한다. 그동안 바깥세상 구경에는 찻길까지 3시간거리의 계곡을 걸어야 했다는 것.
찻길이 났다 하지만 험로여서 지금도 통행이 만만치 않다. 웬만한 것은 이골이 베어 참을 수 있으나 머리는 자꾸 길어지는 터라 이발하러 다니기가 제일 불편하단다. 그래서 이발은 1년에 딱 3번. 둘이서 날잡아 읍내 이발관으로 나간다고.
"전기는 70년대 초반, 전화기는 그 10년전 뒤에 들어왔지. 신기했던 것은 물론 생활이 달라진게야. 전기로 밥을 해먹는다는 것을 상상이라도 했겠어. 산중에서 멀리있는 자식들과 안부를 전할 수 있다는게 믿기지 않았어" 더이상의 욕심이 없지야 않았지만 전기와 전화만으로도 누더기 같은 산촌생활의 고난을 모두 보상받는 듯 했다는 두사람의 회고다.
대부분 고추와 콩을 갈고 있는 이들은 약초캐기와 짐승잡이는 하지 않았다 한다. 산중 생물을 해치다 일월산신의 노여움을 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란다. 제법 너른 화전이 농사일외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단다.
"담배농사로 가족을 먹여 살렸으나 10여년 전부터 힘에 부치고 도와줄 사람도 없어 완전히 접었지""할일없는 황초집이 너무 여럽게 보여 뜯어 버리려 했으나 내 여생처럼 가만둬도 멀지않아 사그러질 양이어서 그냥 둔게야"
또 한곳의 산촌. 일월면 도곡리 월간마을과 갈골·방아모기·새등실·샘물내기. 일월산 남서릉 자락밑으로 나있는 이곳 마을들은 지난해 인근에서 시작된 저수지 공사로 수장된다.
포클레인 굉음 속에 저수지 공사가 한창인 월간(月澗)마을. 2, 3년 전만해도 10여 농가가 살았으나 지금은 모두 떠나고 황창동(79)할아버지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황씨 할아버지는 고향 수몰생각에 잠을 설친다. 농막 오른쪽에 있는 황초집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오랫동안 사용됐던 디딜방아에 앉기도 한다. 연신 한숨뿐이다. 골짝을 1시간 거슬러 올라 나타나는 갈골(葛谷)마을. 초입부터 꽉들어찬 두충나무들로 집들이 파묻혀 있다. 4년전부터 역시 홀로 마을을 지키고 있는 김용섭(61)씨갈골의 땅 곳곳에 김씨는 두충나무를 심었다. 10여년전 값이 좋다고 해서 심었으나, 최근 가격이 폭락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됐다. 헛농사를 지은 셈이다. 김씨는 "조선 인조반정때 경주 최씨가 난을 피해 입향, 부촌을 형성해 살았다는 내력이 있는 곳"이라며 6·25전쟁이 끝난 이후 20여농가가 살았으나 지금은 혼자라 한다.
김씨는 저수지 물이 차 오르면 이곳을 떠날 생각이다. 주위의 방아모기와 새등실 샘물내기 마을 15여가구는 떠난지 이미 오래.
이웃이 떠난 빈집들은 김씨가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주민들이 두고간 화전과 집 농막이 모두 자신의 차지가 됐지만 넉넉함은 고사하고 되레 마음은 허전히 오그라만 든다"는 김씨의 되뇌임은 수구초심(首丘初心) 그이상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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