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속의 대구 문화예술계-피란지 대구 무용

입력 2000-06-28 14:10:00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인민군이 낙동강을 위협하고 있었던 1950년 8월15일 저녁. 한여름 땡볕도 서서히 잦아들고 어느덧 어스름이 내릴 무렵이었다.

대구시 중구 상서동, 현재의 '만경관'건물. 좁은 공연장을 꽉 메운 관객들은 곧 열릴 무용 무대앞에서 더위도 잊은 채 숨을 죽이며 공연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앗,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공연시작 불과 몇 분을 앞두고 전기가 나갔다. 관객들의 한숨소리. 그러나 실망은 한 소녀의 반가운 외침에 환호로 변했다. "선생님, 불 들어왔어요"

대구의 원로무용인 최원경(68·여)씨는 자신의 외침을 듣고 기뻐하던 관객들의 표정이 아직도 눈가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어지러운 전란기, 피란지 대구의 무용무대는 이처럼 시름에 잠겼던 피란민들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약손'이었다.

당시 대구에는 서울에서 피란을 내려온 타지의 무용인들이 갖가지 무대를 만들어 자신들의 '끼'를 보여줬고 향토 무용인으로서는 최원경씨의 남편이기도 한 고(故) 김상규가 활약했다.

송범, 김백봉, 김백초, 임성남, 이인범, 박금설, 주리씨 등이 서울에서 왔던 대표적 무용인들이었다. 이 가운데 송범씨는 문하생들과 동료들까지 함께 대구로 데려와 국내 최초의 전문무용단인 '한국무용단'을 창립했다는 것.

송범씨는 50년 8월15일에 열렸던 광복절 경축행사를 비롯, 만경관과 현재의 한일극장(당시 중앙국립극장) 등에서 공연을 가졌다.

최원경씨는 "연습할 장소가 없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며 "당시 중앙국립극장을 연습장으로 쓰기 위해 이해랑씨의 연극공연이 끝난후 밤 12시부터 심야연습을 하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무용인들도 다른 예술인들과 마찬가지로 '군예대'로 꾸려져 52년부터 1년에 1번씩 국군은 물론 UN군과 육군병원 등에 위문공연을 가기도 했고 전선을 따라 종군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란의 와중에서도 꾸준히 열리던 무용공연에는 음악인들의 조력이 컸다. 당시 이경희씨가 피아노를, 조념(바이올린), 이기용(바이올린), 박지홍(장고), 김옥진(가야금)씨 등이 각자의 특기를 발휘, '춤사위'의 우아함을 빛내줬던 것.

"박목월·조지훈 선생 등 당시 대구에 머물던 문인들은 무용연습장면을 보고 칭찬해준 뒤 단원들을 데리고 향촌동 막걸리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곳에서 문인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시간가는 줄 몰랐죠" 최원경씨는 전란중의 낭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편 전란기 대구의 무용공연은 대부분 유료공연이었지만 많은 이들로 북적댔고 한무대에서 한국무용과 현대무용, 발레 등을 섞어 한꺼번에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崔敬喆기자 ko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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