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차의 완성자, 센리큐(千利休)가 차수업을 받던 젊은 시절. 하루는 그의 스승 다케노(武野紹鷗)와 차모임을 가고 있었다. 다구점(茶具店) 앞을 지나다가 두사람은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꽃병에 동시에 눈길이 멎었다. 다케노는 돌아오는 길에 사려고 마음먹었으나 센리큐가 한발 앞서 그것을 차지하고 말았다. 며칠후 센리큐는 차모임을 열고 다케노를 초대했다.
스승 다케노는 틀림없이 센리큐가 새로 산 꽃병을 내놓으리라 짐작하고 집을 나서면서 몰래 망치를 소매속에 숨겨갔다. 전날 센리큐가 산 꽃병의 양쪽 손잡이가 격에 맞지 않아 마음에 걸렸던 터다. 그러나 다실을 들어 선 다케노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이미 그 꽃병은 한 쪽 손잡이가 날아가고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일화의 주인공 센리큐로 인해 일본 다도는 형성되고 그 이후 여러 유파(流派)가 생기게 된다.
후쿠오카 코이시와라 무라(小石原村) 다카도리 팔산(高取八山)가는 370여년 전부터 그토록 높은 경지의 심미안을 가진 이들 다도가 우라센케이(裏千家)의 다구 지정납품집이다. 그런만큼 이번 여로는 일본 정통 다도의 맥을 건사해온 장인(匠人)집안을 찾아간다는 긴장감으로 뒷덜미가 뻐근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초대 선조가 경상도에서 건너왔다는 점에 얼마간 친근감도 간다.
초대 다카도리는 임진왜란 때 고령군 성산면 팔산리에서 후쿠오카 번주(藩主)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에게 부자(父子)가 함께 포로가 된다. 그 후 정유재란 때는 난을 피해 친정으로 가있던 부인과 장인마저도 구마모토 번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政)에게 잡혀오게 된다.
이에 다카도리는 번주에게 청원하여 가족이 모두 재회하는데, 다른 도공들이 가족과 생이별하고 이국에서 매인 몸이 된데 비해 다카도리 집안은 차라리 복받은 편이다.
그렇지만 다카도리는 몽매에도 고향을 잊지 못한다. 그의 이름을 다카도리 팔산이라고 쓴 것도 고려인에서 '고(高)'자를 따고 처음 가마를 열었던 앵취산(鶯取山)의 '취(取)'자를 따서 다카도리로 붙이고 조선의 고향 팔산리(八山里)를 잊지않기 위해 조선말 소리 그대로 '팔산(八山, 핫산으로도 발음)'으로 쓰게 된다.
또 1624년에는 조선에서 강홍립 일행이 포로 교환을 위한 쇄환사(刷還使)로 일본을 왔을 때, 고향으로 돌려 보내달라는 탄원서를 가지고 그들을 만나러 간다. 도중에 번의 군사들에게 잡혀 다카도리는 번주로부터 칩거명령을 받고 당인정(唐人町)내 깊은 숲속에서 생활잡기를 구우며 지내는 신세가 된다.
6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 1630년 분노가 가라앉은 번주는 다카도리를 다시 불러들여 엔슈(遠州, 일본 다도 7장인파 중의 한 유파)의 관요를 맡기게 된다.
막상 다카도리가 관요를 맡았지만 마땅한 흙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각처의 흙들을 구해다 섞어 쓰며 옳게 된 그릇 하나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쏟아붓게 된다.
훗날 한 사람 도공이 만들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명기(名器)를 가진 가문이 된데는 초대 다카도리가 피와 땀으로 버무려졌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다카도리가는 엔슈 다카도리로 불리며 일본내에서 최고 차그릇 가문이 된다.
그 때의 그릇들은 조선 어디서나 흔히 만들어지던 영락없는 분청사기들이었다. 다만 문양과 굽의 처리가 조선양식과 달라 그릇 용도가 차에 맞춰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다카도리 집안의 명성도 9대 때 들어 폐번(廢藩)으로 이어지는 명치유신으로 큰 질곡을 맞게 된다. 그동안 번주로부터 녹봉을 받고 헌상품을 만들던 이 가마는 번이 없어지므로 생활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그렇다고 엔슈 다카도리의 자존심을 팽개치고 시정잡배를 위한 잡물을 만들어 저자 바닥에 내다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9대 다카도리는 급속히 스러져가는 가세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0대 다카도리는 생각이 달랐다. 당장 굶어 죽을 판에 엔슈 다카도리란 명성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뭐든 만들어 팔아 당장 때꺼리를 해결하자고 아버지를 설득한다. 그러나 장인의 명예 하나로 버텨온 아버지에게는 통할 리 만무. 할수없이 10대는 자기 집안에서 일하던 직인이 인근에서 가마를 열자 그 밑에서 잡기(雜器)를 만들며 흙일을 배우게 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아버지는 직인에게 일을 배운다는 데 격분하고 부자의 정을 끊게 된다.
"이젠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더구나 다카도리가는 될 수 없다. 더 이상 집안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며 아들을 쫓아내고 그 날로 곡기를 끊고 몸져눕는다.
쫓겨난 아들은 열흘쯤 뒤에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달려온다. 뜰아래 무릎을 꿇고 밤새워 빌었지만 용서를 받지 못하고 새벽녘에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9대 다카도리는 그날 오후 세상을 하직한다. 10대 다카도리는 통한의 장례식을 치르고 다시 아버지가 남긴 가마에 불을 지핀다.
그러나 10대 다카도리가 직인에게서 배워온 기술은 다카도리 집안의 전통기법과는 거리가 먼 조잡한 기술이었다. 가세는 계속 기울었지만 10대는 침식도 잃고 도자기 하나에만 몰두한다. 생의 모든 기력을 쏟아부어 흙에 매달린 결과, 1938년 첫 개인전을 도쿄에서 열 수 있을 정도가 된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전시회 마무리 작업을 하던 10대 다카도리를 거두어 가버린다. 과로와 영양실조로 고인이 되어버린 10대의 작품전은 결국 유작전(遺作展)이 되고 말았지만 언론들은 다시 다카도리가의 명품에 주목하게 된다.
현대 들어 다카도리가를 본격 중흥시킨 것은 11대 다카도리 세이잔 여사이다. 세이잔 여사는 어린시절 9대와 10대의 갈등 속에 배고픔을 참으며 지낸 억척스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여고 졸업후 보험회사를 다니다가 결혼을 하지만 시어머니와 갈등으로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오고 만다.
결국 가업을 잇기로 작심하고 도공의 길로 들어선다. 그렇지만 삭은 물레, 피폐한 허물어진 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워낸다는 것은 무(無)에서 유(有)를 일구어내는 작업. 선대가 걸어온 형극의 길을 처음부터 다시 되밟아야하는 고통의 날들일 수밖에….
아버지가 어디서 흙을 파왔고 유약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3~4년동안 온갖 흙을 파다가 물레를 돌려 보았지만 도무지 그릇다운 그릇을 만들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차에 세이잔여사는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선대가 깨알처럼 적어둔 도자기 비전서를 발견하게 된다. 천하를 얻은 기분으로 흙속으로만 파고 들기를 20여년. 다카도리가 400년 전통을 고스란히 재현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중간에 이혼하면서 헤어졌던 아들이 장성해서 어머니 곁으로 돌아와 도공의 길을 함께 가게 된다. 손자(현 다카도리가의 당주)도 태어나 할머니 세이잔 여사는 다음 세대 영광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또하나 다카도리 모자(母子)는 선조들이 물려준 위대한 업적에 감사하며 초대 선조의 고향을 찾아 나선다. 단서는 초대의 이름 '팔산'과 당시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와 가토 기요마사의 임진, 정유난 때 행로가 겹치는 곳. 팔산리란 지명을 중심으로 전국을 수소문 한 모자는 고령군 성산면 팔산리가 선조의 고향임을 확신하고 마을 뒷산 '절골'에서 조상들의 그릇과 유사한 그릇 파편들을 수습하게 된다. 400년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은 세이잔 여사는 고령 현지로 달려가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선조들의 혼령을 위무하는 제를 올리고 통한의 눈물을 쏟아 붓는다. 그리고 400년 선조들이 가져온 기술을 되돌려준다는 취지에서 한국의 젊은이 두 명을 일본으로 데려와 집안의 기술을 전수하게 된다.
이땅의 우리들에게는 이미 가마득한 전설이 되어버린 임진왜란이 이들 다카도리가에는 이렇게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글·사진 전충진기자 cjje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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