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의약분업 실시를 위한 해법

입력 2000-06-20 15:18:00

의약분업이 오늘날 이 지경으로 꼬이게 된 것은 의료계의 지나친 상실감과 의구심 및 정부의 준비부족에 그 원인이 있다.

표면적으로 의사들은, 의약분업이 실시되면 의사의 약 조제권이 완전히 상실되는 반면 약사의 임의조제 가능성은 계속 남는다고 주장한다. 또 의사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에 속해야 하는 것들이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된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마디로 의사에게 큰 희생을 요구하는 제도이며, 또 그러한 제도로는 국민들의 의약품 오남용을 억제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일견 사실 같기도 하지만 상당부분 과장된 것도 있어 보인다. 예를 들어 약사들은 앞으로도 감기 환자에게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된 진통제와 해열제나 다른 약품을 임의로 함께 팔 수 있다. 의사들은 이를 임의조제라고 한다.

그러나 약사들은 더 이상 과거처럼 항생제 처방을 임의로 할 수 없다. 그같이 남용 때 내성이나 부작용이 우려되는 약품은 반드시 의사 처방을 필요로 한다. 이를 세 번 위반하면 약사들은 면허가 취소된다. 이것을 임의조제라고 한다면 전문의약품과 일반 의약품으로 분류하는 의미가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의약분업은 약의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로서 일견 국민을 불편하게 만드는 제도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러한 불편은 가능하면 최소화 시켜야 한다. 만일 의사들의 주장처럼 전문의약품을 지금의 60% 수준에서 전체의 80% 수준으로 늘린다면 그만큼 의료기관 방문이 더 필요해져 국민 경제적 부담 증가와 과도한 불편을 초래하게 된다.

또 생기는 의문은 의사들의 주장이 설사 옳다 해도 그것이 과연 총파업이나 폐업의 충분한 명분이 되는가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의사들이 그동안 처해 있던 현실과 의사라는 직업의 '독특한 정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1989년에 전국민 의료보험 제도가 실시되면서 의사들에게는 '좋았던 시절'이 가버렸다. 의료보험 수가가 관행 수가의 절반 수준에서 책정되면서 의사와 병원은 의료보험의 규제를 회피할 수 있는 '상품' 개발에 몰두하게 됐고, 고가 진료장비 구입이나 지정진료, 병실료 차액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익을 올려 의료보험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보전하였다. 이번에 문제가 된 약값 마진도 이 범주에 속한다.이러한 비정상적 수익구조는 직업적 자부심이 높은 의사 집단에 큰 상처를 입힌 것으로 생각된다. 의사들이 이번에 주장하는 바가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정당하게 진료의 대가를 받으면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단순히 의약분업의 문제가 아니라 의료보험 제도를 포함한 의료제도 전반의 개혁을 의사들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료모순의 현실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총파업의 명분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의료모순은 오랜 세월 누적돼 만들어진 것이라 일조일석에 고치기가 쉽지 않으며, 또한 병원과 의사들도 거기서 상당부분 이익을 취해 온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의사들의 주장이 원론적으로 옳으면서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문제의 해법은 우선은 의사들이 냉정함을 되찾는 것이다. 의사들은 총파업이라는 충격요법을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의사들의 주장이나 방식에는 허점이 너무 많다.

총파업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의사의 주장에 귀를 기울지지 않았던 데에는 정부의 잘못 못지 않게 의사들의 잘못도 크다. 환자들이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하고, 불친절을 호소해도 그동안 의사들은 잘못된 의료제도 탓으로만 돌릴 뿐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던 의사들이 갑자기 폐업을 한다는 것을 국민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말로는 국민건강을 위해서 폐업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그동안의 의사들 행동을 보면 이 말이 별로 국민들에게 설득력 없다는 점을 의사들은 곰곰히 생각해야 한다. 더욱이 최소한의 진료기관도 남겨놓지 않고 모두 파업에 동참토록 한 방식은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에겐 전혀 걸맞지 않는 방식이다.

둘째 해법은 의료문제를 큰 틀에서 논의하는 구조를 확립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의료문제에는 단순히 의약품 남용 문제만이 아니라, 의료 전달체계, 의료보험 문제, 의사 양성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의 손질만으로는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지기 어렵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의료제도 전반을 총체적으로 개혁하는 청사진이 필요하다.

그동안 이런 논의는 학계 일부에서만 진행됐고 정부나 의료계에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양측 모두 이점에서 반성이 필요하다. 특히 의료계는 의약분업에 직면해서도 이를 방관하고 있다가 정작 정부가 의약분업의 전단계로 약가 마진을 없애는 정책을 실시하고 그 결과 수입이 줄어들자 그때서야 모든 의사가 일제히 모든 잘못을 정부에 돌렸다. 전혀 합리적인 대응방식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정부 역시 의료개혁의 청사진을 먼저 제시하고 그 추진 방법과 일정 등을 먼저 협의 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혼란은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셋째 해법은 의료문제를 더 이상 의사들만의 문제가 아닌 국민전체의 복지가 관련돼 있는 사회문제로 보는 시각을 갖추는 것임을 강조하고 싶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많은 의사들은 "왜 의료에 문외한인 시민단체들이 의료문제에 개입하는가"하고 공박했다. 정부도 그동안 의료문제를 의료계 관련 인사들로 한정해 논의하는 폐쇄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의료문제는 더 이상 의사들만의 전문적인 분야라고 할 수 없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의료문제가 중요한 정치적 문제로 되어 있고, 대통령 선거전을 좌우할 정도로 깊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삶의 질에 관련되는 중요한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료제도가 우리에게 적합한 것인지, 의료비의 수준이나 의사들의 수입은 어느 선에서 결정돼야 하는지를 이제 국민들은 알아야 하고, 또 국민들의 총체적 의사가 여기에 반영돼야 한다. 만일 국민과 의료계가 이런 근본적 문제에 대해 합의한다면 의보료 인상이나 의약분업 실시는 매우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의료문제를 두고 사회적 논의가 제대로 진행된 적이 없다. 의사들은 의료기관 경영이 어렵다면서도 경영 투명성을 위한 자료공개에 응하지 않고 있으며, 정부도 보다 많은 국민들이 의료문제 해결을 위해 관심 갖고 참여토록 하지 못하고 있다.

어찌됐든 의약분업은 한국 의료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되는 개혁정책이다. 따라서 이것을 성공시키는 것이 앞으로의 개혁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 국민들도 약품 사재기 같은 이기적 행동을 자제하고 의약분업으로 인한 불편을 감내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할 때이다.

1977년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1988년 위스컨신대 박사

(학위논문 '한국의 국가와 의사')

국내 의료사회학 개척자

보건사회학회장

대구의료포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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