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길 나의 삶-영화감독 이창동씨

입력 2000-06-13 14:06:00

"지중해나 수성못이나 그게 그거죠"

영화 '박하사탕'의 이창동(李昌東·46)감독. 칸영화제 참가 소감을 묻자 내뱉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무리 봐도 그는 박하사탕처럼 화아~한 맛은 없는 사람같다.늘 쥐어짜듯 고민에 가득 찬 인상. 낡아빠진 청바지에 후줄근한 티. 서울 혜화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요즘 한창 뜨는 감독답지 않게 우울해 보였다.

"행복하십니까?" 이날 기자가 염두에 두었던 첫 질문. 행복을 전제로 그의 삶과 철학, 영화이야기를 풀어나갈 참이었다. 하지만 그의 답은 엇나갔다.

"행복의 개념도, 이미지도 없는데 행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의 '화려한 변신'. 주류인 상업영화를 거부하고 예술적 리얼리즘을 고집하는, 한국의 몇 안 되는 작가주의 감독. 그러면서도 흥행에 성공해 한국 영화계를 화들짝 놀라게 한 인물.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신인감독. 그가 행복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행복하다는 말인가?

"칸에서 한국영화 파티 때 바닷가에 나갔더랬습니다. 지중해를 바라보았지만 (학창시절)수성못을 보던 때와 다를 게 없더라구요. 출구가 안 보이는 시대를 산다는 답답함은 거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작품엔 등짐지고 고개를 넘는 힘겨움이 배여 있다. 해체되는 가족을 고통스럽게 그려낸 '초록물고기'나, 한 사나이의 과거 여행을 통해 이 시대의 아픔을 리얼하게 풀어낸 '박하사탕'.

"마흔을 넘기니까, 내려갈 길이 보이더라구요. 이렇게 살아 되겠느냐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민중문학론, 민족문학론 등 시대에 대한 고민은 많았지만 제대로 행동으로 체현시키지 못한 것은 80년대 작가들의 공통된 특징. 이씨는 지난 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전리'로 등단, '소지' '끈' '녹천에는 똥이 많다' 등의 문제작들을 잇따라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80년대 후반, 사회가 변하면서 이데올로기며 사회에 대해 고민했던 것이 실효가 없어졌습니다. 작가로서의 한계보다는 세태에 대한 실망감이 컸죠"

뭔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그는 영화 쪽으로 눈을 돌렸다. 94년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 조감독으로 첫 현장경험을 하게 된다. "말이 조감독이지 공사판의 노동일 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소설의 소재거리를 찾는 '이상한 소설가'로 봤지만 그는 자학하는 마음으로 일에 매달렸다. 영화를 수단으로 자신을 시험하는 단계.

영화와의 인연은 그의 인생에서 보면 뜬금없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감독 하면 할리우드 키드를 떠올리지만 그는 "영화를 선택한 뚜렷한 계기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연극에 더 가까웠다. 어려서부터 큰형(이필동·극단 '원각사' 대표)의 연극을 보며 자랐다. 대학(경북대 국문과) 재학시절 10여 편의 연극에 출연했고 '수업''엘리베이터' 등 10여 편을 연출하기도 했다.

영화가 뭐냐는 질문에 "영화는 영화지 지가 영화밖에 더 되겠어요?"라고 말을 내던진다. 좀 더 밝은 영화를 찍을 수 없느냐고 묻자 "눈 떠 보니 지옥인데, 거짓말로 하면 모를까, 밝은 재료를 찾을 수가 없다"고도 했다.

세기말이니 새 천년이니 떠들썩했던 1999년.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빼곡이 넣은 '박하사탕'을 세상에 던진 것도, 과거를 잊기 위해 미래의 밝은 모습만 얘기하는 균형감 잃은 우리 사회에 대한 조롱이다. '초록물고기'는 인간애가 상실되는 산업화 사회에 대한 고발이다.

그는 자기 만족을 위한 영화는 절대 만들지 않겠노라고 했다.

"나도 사랑하고 싶고, 사랑 받고 싶죠. 사랑을 해도 제대로 하고 싶어요" 자신의 영화를 보고 "관객이 잃어버린 순수를 그리워하든, 삶의 누추함에 슬퍼하든 그건 보는 이의 몫"이라며 심드렁하던 그에게 이런 강한 자기애는 뜻밖이다.

"문제는 인간입니다. 제대로 소통하고 싶어요" 이런 그의 소망은 이미 '박하사탕'에서 그 가능성이 엿보였다. 관객 10명 중 3, 4명은 '재미없다'고 한 반면 2, 3명은 '광분'했다. 예상을 뛰어 넘는 반응. '한국 독자, 한국 유권자, 한국 관객 안 믿는다' 던 그도 "관객에게 빚을 졌다"며 고마워했다. 특히 30, 40대가 공감할만한 얘기를 20대가 많이 봐 준 것에 고무 받은 눈치.

세 번째 작품에 대해 묻자 "영화감독으로서 운명이 곧 아웃될(끝날) 지도 모른다"는 말을 내비쳤다. 흥행압박, 제작비 조달 등이 견뎌내기 힘든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얼마 전만 해도 "세 번째 영화도 인간에 대한 얘기일 것"이라 자신하던 그다.

"인생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숨쉬는 것이며 느끼는 것"이라는 그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길은 "아무래도 소목장(小木匠)이 맞을 것 같다"고도 했다. 탁자나, 의자, 선반 등을 다듬는… 연극인, 교사(경북 영양고, 서울 신일고), 소설가, 영화감독에 이제 목수. 어느 것에서도 찾지 못한 행복을 나무에서 찾고 싶다는 얘기일까?헤어지면서 다시 한번 더 "행복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큰소리로 "하하하" 웃었다. 처음으로 웃는 모습. 그러나 대답은 하지 않았다.

지독히 고민하는 한 사내의 그림자가 혜화동 뒷골목 가로등에 길게 걸렸다. '박하사탕'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던 김영호가 오버랩됐다.

대구로 오는 동안 흐린 말로 "좀 덜 괴로웠으면…"하던 그의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金重基기자 filmtong@imaeil.com

---이감독의 영화세계

자신이 뭘 찍고 있는 지도 모르는 요즘 신인 감독과 달리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두고두고 곱씹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캐릭터에 대한 뛰어난 관찰, 극사실적인 인물묘사, 정교한 내러티브. 무엇보다 시대에 대한 성찰이 담겼다는 점에서 이 감독의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초록물고기'의 막둥이(한석규), '박하사탕'의 김영호(설경구)는 모두 죽음을 맞는다. 그들을 죽인 것은 사회의 부조리. 우리 시대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자본과 정치 논리의 광폭성을 드러냄으로써 '영화는 사회의 투영물'이란 측면을 역설한다.

또 나이트클럽 가수 미애('초록물고기' 심혜진)와 첫 사랑 순임('박하사탕' 문소리)을 통해 잃어버린 순수에 대한 갈구를 투영시키는 등 정교한 이야기구조를 보여주었으며 소품, 연기, 조명, 촬영 등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 '준비된 감독'이란 말을 듣기도 했다.

무엇보다 판타지로 흐르는 최근 한국영화에 60년대 '마부''오발탄' 등의 화려한 사실주의 영화의 부활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세계는 큰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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