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코 가즈키(大迫一輝·15대 심수관 일본명·40세)가 어린 시절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오니 아버지(14대 심수관·80세)가 물레 앞에 앉아 바늘을 하나 가져오라고 했다. 오사코가 바늘을 가져오자 아버지는 그가 가져온 바늘을 물레위 흙덩이 한복판에 꽂고 물레를 차면서 묻는다.
"네가 보기에 어떠냐"
"바늘이 돌지 않습니다"고 아들이 대답하자 14대 심수관은 말했다.
"물레는 돈다. 그러나 중심은 돌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자리를 비켜버렸다.
또다시 세월이 흘러 오사코가 대학을 다니던 어느날 저녁 14대 심수관은 오사코를 불러 앉히고 뜬금없이 물었다.
"너는 한사람 남자란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생각에 잠겼던 오사코는 "가족을 먹여 살릴 능력만 갖는다면 한사람 남자로서 역할을 다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바가야로(바보같은 놈). 혼자 있어도 쓸쓸하지 않은 것이 진정한 남자다"고 내뱉으며 방문을 밀치고 나가버렸다.
400년 세월동안 일본속의 조선인으로 민족혼, 즉 '중심'을 잃지않고 꿋꿋이 버텨온 심수관가. 그래서 일본에서 보다 한국에서 더 유명해진 집안. 도예는 손끝으로 하는 예술이 아니라 마음을 닦는 수양임을 알고있는 '진정한 남자들'.
심수관가가 있는 사쓰마를 찾아가는 길은 기대감으로 마음이 달뜬다.
심수관 집이 있는 미야마(美山)마을로 가기 위해 이쥬인(伊集院)역을 내려선다. 일렁이는 소철나무에서 일본열도 끄트머리답게 남국의 향취가 물씬 묻어난다. 안내인이 심수관 요장에 연락을 하는 동안 역광장으로 나선다. 역광장 중앙에는 말을 탄 왜장의 동상이 우뚝 서있어 호기심이 동한다.
자세히 뜯어보니 앞에 버티고 있는 동상은 바로 임진왜란 때 전라도 지방을 초토화 시켰던 시마스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동상이 아닌가.
석판에 새긴 비문은 '17대 사쓰마 번주 시마쓰 요시히로는 전장에서 적에게 등을 돌리는 법이 없이 적진으로 돌파해 무사로서 이름을 떨쳤는데 그 무골을 천하에 알리고자 비를 세운다'고 시작된 찬사는 '엔카(演歌), 차(茶)에도 조예가 깊어 사쓰마 가마를 여는 등 문무를 겸비한 명군(名君)이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일본의 명망높은 장수일수록 우리에게 있어서는 악명 높은 원수가 되는 법.
사쓰마의 도조(陶祖) 박평의나 심수관가 초대 심찬(도래후 심당길로 개명)도 1597년 남원성이 잿더미가 되고 바로 이 시마쓰에 의해 잡히는 신세가 된다. 그 때 잡힌 80여명 포로들은 모두 웅천(현재의 진해)으로 끌려가 짐승의 무리처럼 빈배에 채워진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공들을 태운 시마쓰부대는 해상에서 수군의 공격을 받게 된다. 때문에 그들은 웅천을 떠난지 한해가 지나서야 형편없는 몰골로 가고시마(鹿兒島)의 구시키노(串木野)해변에 당도한 것이다.
구시키노에서 움집을 틀고 정착한 그들은 8년여 동안 조선에서 가져온 흙으로 도자기를 굽는다. 그러나 원주민들의 횡포에 못이겨 가마를 버리고 다시 유랑의 길을 나서 미야마에 정착하게 된다.
심수관 요장으로 연락을 했더니 14대 심수관은 일본교육개혁위위회 위원(각계 인사 20인으로 구성된 기구로 차관급에 해당)으로 위촉되어 동경에 머무르고 있고, 15대 심수관이 몇시간 전에 동경서 출발했다고 연락이 왔으니 곧 도착할 것이란다자투리 시간을 쪼개 박평의 유적을 찾기로 했다. 박평의는 400년전 사쓰마로 80여명 도공들의 우두머리로 오늘날 사쓰마가 있도록 한 장로이기도 하다. 심수관 집안이 단군신을 모시고 일년에 한번 제를 올린다는 '옥산신사(玉山神社)' 근처 공동묘지 한쪽 가장자리에 박평의 묘비가 오두마니 자리하고 있다.
묘비에는 사쓰마 도기 창조 박평의 기념비( 摩陶器創祖 朴平意紀念碑)로 적고 뒷면에는 당시 조선 도공들이 미야마에 정착하는 과정을 개략적으로 기술해놓고 있다. '박평의는 미야마 인근에서 백토, 약석, 유약재료를 발견하여 침식(寢食)을 잃고 작업에 몰두하여 번주(藩主)에 바치므로 세이우에몬(淸右衛門)이란 성을 하사받고 1624년 5월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묘비는 성(姓)을 하사받을 만큼 번주의 관심을 받은 도공의 업적에 걸맞게 번듯하여 한결 위안이 된다.
묘소에 참배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목에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비켜서며 목례를 한다. 혹시 빠뜨린 유적이 있을까 해서 "미야마에 조선도공의 유적들이 어떤 것이 있느냐"고 물으니 몇몇 곳을 주워 섬기다가 조선도공 유적인지는 몰라도 옥산신사 입구 대밭 속에도 묘비가 하나 있단다. 들어보지 못한 유적이기에 흥분을 억누르고 아주머니가 일러준대로 대숲을 헤치고 산기슭을 뒤진다. 그곳에는 산야 아무데서나 구르는 돌을 주워다 세운 듯 '차씨지묘(車氏之墓)'와 '2대 차씨지묘'라고 쓰인 비석 두 개가 나란히 맞붙어 있다.
50센티쯤 돼 보이는 초라한 돌덩이에 어설프게 새긴 비문을 대하니 허망함이 앞선다. 세상에 이름 석자 내놓지 못하고 살다가 이국땅 한 줌 흙으로 돌아간 조선 원혼의 흐느낌이 들리 듯…. 어떻게 돌보아줄 후손 하나 없이 이렇게 스러져 가야만 했을까. 안타까움에 한숨이 절로 새어난다.
비석 옆에는 1998년 2월 발굴 경위를 보도한 신문 내용을 코팅해서 붙여놓았는데 조선풍의 화병 2점이 함께 수습되었다고 기사는 적고 있다. 아직 국내에 한번도 소개된 적이 없던 이 묘석은 시마쓰가 조선도공에게 하사했다는 7개 성씨중 한 주인공이 아닐까 추측해 볼 따름이다.
내친 김에 다리품을 좀더 팔아 조선 도공들이 그릇을 구웠다는 '400년전 가마터'를 둘러 보기로 한다.
400년 가마터는 '사쓰마 도자문화관'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산기슭에 불과했을 법한 산비탈 평지에는 근사한 조선식 오름가마가 조선식 기와 지붕을 덮고 날렵하게 서 있다. 가마 옆에는 적벽돌로 구조물을 쌓고 위에 마치 조그만 성화(聖火)와도 같이 불을 지펴 놓고 있다.
안내문은, 1998년 사쓰마 개요(開窯) 400년을 맞아 한,일간 우호증진의 증표로 만든 기념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옆의 불은 어설픈 구조물 위에 놓였지만 이면에는 나름대로 의미를 담고 있다.
400년전 조선 도공들이 흙과 기술을 갖고와 이름하여 '히바카리(火計茶碗)'란 그릇을 구웠는데 그 때 불만은 일본 불을 쓸 수밖에 없었단다. 그래서 그릇 이름이 '불만을 빌린 차그릇'으로 지어졌다.
해서 400년 세월을 건너뛰어 한국 남원으로부터 불마저도 가져와 일본 속에서 한국 도자기를 굽는다는 뜻으로 그 불을 보존하게된 것이다. 이 사업은 당시 일본에서는 심수관가가 주축이 되고 한국에서는 도자기협회와 남원문화원, 해양대학 등이 참여하여 국가적 이벤트로 치렀던 기억이 새롭다. 행사 당일에는 김종필 총리와 오부치 총리가 나란히 참석하여 환담하던 장면이 TV에 비치기도 했다.
그 이후 1999년 마지막 밤과 2000년 신새벽 사이에는 한국 이천의 도공들이 도자기를 초벌구이 해와 여기 '400년 가마'에서 재벌구이 하므로 한 세기의 역사를 마무리 짓는 이벤트를 가졌다. 앞으로 사쓰마는 2001년 이천 국제도자기축제에 즈음하여 다시 사쓰마의 도자기를 이천으로 가져가 구우므로 한·일 선린외교의 교두보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기대다.
이천과 사쓰마의 교류. 그것은 400년을 뛰어넘어 끊어진 역사의 맥을 다시 잇는 상징성을 갖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두웠던 역사를 인정하고 가슴속으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지않는 한 선린외교는 한낱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라는 우려감을 지울 수가 없다.-글·사진 전충진기자cjje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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