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전선-(4)칠곡 천평 방어전

입력 2000-06-09 14:06:00

"나는 한성 여고생이다. 국방군아 총부리를 돌려라. 대구가 눈앞에 보인다…" 초생달이 서산에 비껴 걸렸던 466 고지의 여름밤. 인민군 진영에서 끊어질듯 이어지는 선무방송. 전선을 할퀴고 지나가는 앙칼진 목소리도 피비린내를 머금고 있었다이윽고 수류탄 두발을 움켜쥔 의용군들이 "만세"를 외치며 돌격해 왔고 5시간에 걸친 백병전이 전개됐다. 전우의 몸뚱이가 수류탄 폭음과 함께 산산조각나며 흩어지고 어스레한 달빛아래 총검이 살기를 번득일 때 마다 비명과 울부짖음이 산자락에 메아리쳤다.

학도병 참전자 김복룡(67·당시 11연대 1대대 1중대 일등병·대구시 진천동)씨. 그때 의용군들중에는 인민군이 남한 점령지역에서 강제 동원한 소년들이 많았다고 했다. "같은고향 젊은이들이 서로 적이 되어 죽이고 죽는 경우가 허다했지요. 수류탄을 들고 미친듯이 돌진해 오는 의용군들의 입에선 독한 술냄새가 났습니다"무덥고 피비린내 나는 여름밤. 광복 5주년을 맞은 15일 밤에 시작된 혈전은 동틀 무렵에야 일단락됐다. 음산한 적막에 휩싸인 고지에는 이따금씩 들려오는 부상병들의 신음소리만 애달픈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11연대 3대대 특공대 일등병으로 674고지(유학산 동쪽 끝 봉우리)에서 전투를 벌였던 황권주(黃權柱·70·다부동전투 구국용사회 홍보이사)씨는 "복부에 총탄을 맞고 솔가지에 걸린 창자를 두손으로 끌어 넣으면서 죽어가던 인민군 병사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20일 오후 1시경에는 이 고지에 출격한 미군기가 3대대 장병들에게 느닷없이 기총소사와 네이팜탄을 퍼부어 280명의 사상자를 내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참전자들은 "고지 진출을 눈앞에 둔 부하 장병들의 참변에 3대대장 정영홍 소령이 땅을 치고 통곡했다"고 전한다.

다부동 전투에서도 피아를 구별못한 미군기의 오폭이 많았다. 속절없는 죽음들. 모두가 그놈의 '전쟁' 때문이었다.

상주와 안동에서 내려오는 길이 합쳐지는 천평 삼거리(새술막)에서 진목정을 거쳐 다부동에 이르는 3km의 도로변 고지에 투입됐던 병력은 국군 1사단 11연대(연대장 김동빈 대령·육사1기·중장예편). 주임무는 이곳을 돌파해 대구로 진격하려는 인민군 기계화부대의 접근로 방어였다.

따라서 국군은 천평계곡 좌우로 늘어선 466·356·674 고지 등에서 고지쟁탈전을 계속했으며, 전차와 포병대대를 거느린 미군 27연대가 인민군 13사단의 전차연대와 전차전을 벌였다. 국군 보병연대와 미군 전차부대가 합세한 인민군과의 일대 격전이었던 것.

다부동 전투가 절정에 이른 21일, 천평계곡 일대에서는 개전이래 최초의 대전차전이 불붙었다. 골짜기에는 미군과 인민군 전차포가 발사한 철갑탄 불덩어리가 밤하늘을 수놓으며 그 굉음이 산천을 뒤흔들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미군들은 이날 밤의 전차전을 '볼링 앨리(Bowling Alley)의 전투'라고 이름 붙였다. 전차와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어내면 상대편 배후 산등성이에 볼링핀이 쓰러지듯 '따다닥 따다닥' 소리와 함께 포탄들이 작렬한 것에 비유한 것이다.

날이 밝자 인민군은 파괴된 전차 7대와 1천여구의 시체를 남겼다. 참혹하게 널브러진 젊은 주검들. 그들도 두고온 고향과 애타게 그리운 부모형제가 있을 터였다. 50년이 지난 오늘, 무심한 세월은 그날의 상흔을 신록으로 뒤덮었지만, 무주고혼들이 돌아가 잠들 조국은 아직도 두 동강난 그대로다.

24일 새벽 어스름이 사라지자 천평에서는 그토록 악착같던 인민군의 공세가 자취를 감췄다. 다부동 전사는 "진목정~천평 일대에는 T34 전차 13대와 SU76 자주포 15문, 23대의 각종 차량이 파괴된채 흩어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6월 25일 38선을 돌파한 이래 국군 병사들을 그토록 공포에 떨게했던 소련제 T34 전차의 위세도 이곳 천평계곡에서 꺾이고 말았다. 이날부터 국군 1사단은 328고지~숲데미산~유학산~가산능선에 이르는 당초 최후저지선(Y선)을 완전히 회복했다. 그러나 다부동전투는 여기서 끝난게 아니었다. '제2의 결전'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趙珦來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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