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 꽃핀 우리 도자기문화-6)

입력 2000-06-05 14:14:00

땟국물에 찌든 수건을 머리에 질끈 묶은 중늙은이는 이불보퉁이를 지고 삐쩍 마른 암소를 힘겹게 따라간다. 걷어붙인 홑바지 아래 제법 근육이 불거진 사내애는 박달나무로 만든 물레를 지고 허우적 허우적 땅만 보고 길을 재촉한다. 에미는 부엌살림을 광주리에 담아 이고 젖먹이를 들쳐 업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뒤로는 올망 졸망 아이들 서넛이 덩치에 맞춘 보따리들을 머리에 이거나 망태기에 넣어 지고, 반은 맨발로 타박 타박 따른다. 외로 고개를 삐틀친 젖먹이는 울다 지쳐 잠이 들었는지 기척이 없다.

먼 옛날 조선의 사기장이 일가가 흙을 찾아, 땔나무를 찾아 정처없이 떠나는 광경을 상상해 본다. 어딜가나 '점꾼'이라며 천대받고 양반 동네 근처는 오두막도 못틀고 쫓겨나기 일쑤였던 고단한 삶이 그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찾아가는 아가노(上野) 집안은 상황이 전혀 딴판이다.

일본의 문헌은 아가노의 초대를 조선도공 존계로 기록하고 있는데 존계는 부산 인근 성주(城主)의 아들로 적고 있다. 또 존계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淨)의 인품에 반해 임진왜란이 끝나고 스스로 청원해서 일본으로 따라온 것으로 나와있다.

때문에 존계는 처음 가라쓰(唐津)에 정착했으나 재주가 출중해 호소가와(細川忠興)의 부름을 받게 된다. 호소가와가 코쿠라(小倉)로 입성하여 성 아래 가마를 박았을 때 그 일을 존계에게 맞기게 된다. 나중에는 다시 호소가와가 히고국(肥後國), 지금 찾아가는 야쓰시로로 영지를 옮기자 존계는 장남과 차남만 데리고 이곳으로 와 정착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어쨌든 풀리지 않는 의문은 과연 성주의 아들이 당시 천민들이나 하는 사기장이 노릇을 했을까. 또 하나 아무리 왜장을 사모했기로서니 제 발로 적국을 따라오길 청했을 것인가. 한국인으로서 자존심 때문에 더더욱 믿고 싶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어딘가 석연찮은 느낌은 감출 수 없다.

갖가지 어줍잖은 추리로 머리가 혼란스러운데 신칸센 차내 방송은 야쓰시로가 가까워졌음을 알린다. 플랫폼으로 내려서니 지방 특산물을 홍보하는 부스 안에 놓인 도자기가 먼저 눈길을 끈다.

아가노 요장은 온천지역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다. 현관문을 밀치고 들어선 상점에는 온통 파르스름한 청자들이 그 색감만큼이나 깔끔하게 진열돼 있다. 이제 일본청자의 본모습을 보게 된다는 생각에 갑자기 바빠진다.

어느 모로 보나 도예가로 보이기 보다 직장인처럼 깔끔한 인상을 풍기는 12대 아가노 히로유키(上野浩之)가 자리를 권한다.

"일본에서는 드물게 보는 청자인데 초대부터 줄곧 청자만 해왔습니까"

"1대에서 3대까지 100년간은 호소가와가 원하는 조선의 여러가지 도자기법을 구사했습니다. 특히 1대때는 청자토를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번주(藩主)가 타지에서 흙을 조금씩 구해다 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여러 군데의 흙을 배합해서 청자를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테죠. 1700년대 들어서 청자토를 발견하고 3대 후반기부터 청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청자만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300년 이상을 만들어왔다는 아가노 청자는 확실히 한국 청자와는 크게 다르다. 그릇표면은 빙렬(氷裂)이 없는 순청자지만 색감의 깊이가 없고 다소 가벼워보이는 맛이 난다. 아무래도 우리의 청자토에 비해 질이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백토를 이용해서 새겨넣은 상감문양은 너무 정교해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청자는 다른 그릇에 비해 제작과정이 복잡해 혼자서 여러 공정을 잘하기는 어려울텐데…"

"명치유신 전까지 우리 아가노 가마는 줄곧 다이묘에게 바치는 어용물만 만들었기 때문에 소량, 고품격을 생명으로 삼았습니다. 다이묘가 차그릇을 원하면 차그릇을 식기를 원하면 식기를 만들어 바쳐야 했습니다. 때문에 가문을 이어가는 종주(宗主)는 완벽한 기량을 습득해야만 합니다. 나 역시 아버지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았지만 대학에서 도자기를 전공했습니다. 저의 아들도 대를 이을 준비를 위해 올해 도쿄예술대학으로 진학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가문이 전통을 잇는 비결입니다"그가 아내에게 무어라 손짓하니 그의 아내는 큼직한 함을 하나 들고 나온다.

"이것은 호소가와 집안에서 우리에게 그릇을 주문한 주문서들입니다. 200년 정도 된 것들인데 보시다시피 호소가와의 지시를 받아 화공(畵工)들이 정교하게 그려 크기, 납품기일까지 지정했습니다. 선조들은 보통 주문량의 3배 정도를 구워 그중에서 최상의 것들만 골라 헌상했습니다. 특히 청자는 흙과 불길에 따라 전혀 다른 모양의 그릇이 되기도 합니다. 때문에 도자기에 대한 완벽한 기능이 없이 이 주문을 맞추어 낼 재간이 없었을 테죠"

그러면서 그는 전시실 뒤편에 있는 작업장으로 안내했다. 물레 앞에 앉아 흙 한덩이를 뚝 떼어 올리더니 능숙한 솜씨로 차그릇 하나를 뚝딱 빚어낸다. 그리고는 조금 마른 다른 그릇을 하나 집더니 정교한 문양을 새겨나간다. 그의 동작들이 마치 음악에 맞춰 춤추듯 자연스러워 차라리 아름다워 보일 지경이다.

마치 바람결에 흔들리는 듯한 야생초 문양들, 이것은 수백년을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이어져온 땀의 결실이라는 생각에 숙연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일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또 그것을 인정해주는 이네들의 풍토가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가 없다.

석양의 골목길을 돌아나오며 우리도 하루 빨리 전통 기능을 인정해주는 사회가 돼야 할텐데 하는 마음 간절하다.-글·사진 전충진기자 cjjeon@imaeil.com

---11대 아가노 히로유키

-한국의 청자와 아가노 청자를 비교해본 적이 있는가.

▲한국은 세 번 가본적이 있다. 차이점이라면 도자기를 사용하는 지역의 생활상과 정서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은 차와 꽃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에 그와 어울릴 수 있는 도자기로 흐를 수밖에 없다. 얼른 보기는 같아 보일 지 몰라도 우리는 일본인의 정서에 맞는 도자기를 추구한다.

-대를 이어 작업할 경우 전통의 현대화가 걸림돌이 될텐데….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현대인에 맞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때문에 전통도 시대 흐름에 맞춰 변화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사용할 때의 즐거움 뿐만아니라 자기의 개성을 표현한 기법, 문양, 형태 등을 연구해야만 전통도 생명력 있는 전통이 될 것이다. 아버지와 나를 비교할 때 기본은 같되 아버지의 선과 내가 즐겨 쓰는 선이 다르다. 물론 같은 문양일지라도 표현 방법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새로운 미의 창조란 어렵지만 시대상에 개성을 더할 때 베스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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