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복칼럼-정치꾼들의 정치

입력 2000-06-05 14:21:00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사실 이 말은 '인간만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함의(含意)가 들어있다. 인간 외의 그 어떤 영장류도 '경제적 동물'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제적 동물'은 자기 한 몸이나 자기가 낳은 새끼 혹은 가족의 호구(糊口)를 위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온 힘을 쏟는 동물을 말한다. 참새나 비둘기, 개, 원숭이 등 모든 동물들이 그러하다. 반면 '정치적 동물'은 개인이익이나 집단이익을 초월해서 전체를 볼 줄 알고 이해할 줄 알고 그 전체를 위해 희생과 봉사를 다하는 동물을 이른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자기몸을 죽여서 인류애를 이룩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과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정치적 동물'은 인간 외의 그 어떤 동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고, 그런 살신성인의 정신은 물론 다른 동물에게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정치인을 '경제적 동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동물'로서 늘상 기대한다. 자기 집단이익의 초월적 존재로서, 보다 큰 전체를 위해 으레 이해줄 것으로 생각하고 또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사고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정치인은 언필칭 '정치적 동물'로 연상화되고 고정관념화 되어 있다. 앵글로 색슨족의 문화가 세계화하면서 흔히 정치인을 폴리티션(politician)과 스테이츠맨(statesman)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앞의 것은 '경제적 동물'로서의 정치꾼, 정치모리배, 정치쟁이를 말하고 뒤의 것은'정치적 동물'로서의 애국자 공인(公人) 정치인을 말한다. 정치를 자기 개인이익이나 집단이익을 위해 장사꾼이 돈을 거래하고 물건을 흥정하듯, 거래하고 흥정하는 정치인을 글자 그대로 정상배(政商輩)라 한다. 이 '경제적 동물'로서의 정상배를 거부시하고 부정시하고 심지어는 범죄시까지 하는 것은 어느 문화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우리 경우다. '경제적 동물'로서 정치인은 수도 없이 많은데,'정치적 동물'로서 정치인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오로지 '나라를 위해서''민주화 투쟁을 위해서'라고 입만 열면 내세우는 사람들도 실상은 '정치적 동물'이 아니라'경제적 동물'이다. 모두 정치꾼이고 정치쟁이고 정치모리배나 진배없다. 정상배들이고 폴리티션들이다. 왜 그럴까. 왜 우리는 정치인들이 자기 이해관계에 부닥치면 하나같이 '경제적 동물'로 바뀔까.

왜 우리는 다른 나라 정치인들처럼 천하위공(天下爲公)이 안될까. 천하위공은 현대 중국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손문(孫文)의 캐치프레이즈다. 내 가족, 내 집단의 이익을 떠나 천하만민이 다같이 누리는 국가이익을 생각하고 건설하자는 사상이다. 근대 중국의 혁명대열에 들어선 대표자들은 이 천하위공 하나만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오히려 그 대표자들이 일반국민보다 더 천하위공이 되지 못했다. 손문은 그의 길지않는 생애 내내 이 천하위공을 부르짖다 죽었다. 결과적으로 반식민지나 다름없는 나라로 전락했다.

어느 나라 국민이든 일반국민들은 아담 스미스의 말대로 사익(私益)으로 살아간다. 사익을 높이려는 그 이기심이 국가를 번영케 한다. 그러나 공무를 수행하는 정치인이나 관료는 공익(公益)이 생명이다. 공익을 높이려는 그들의 이타심이 국가를 부강케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완전히 거꾸로 되어 있다. 일반국민들은 최소한이나마 공익정신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공무를 수행하는, 특히 정치인들은 그 '최소한이나마'의 의식마저도 갖고 있지 않다. 끊임없이 지탄하는데도 고위 정치인은 자기가 속한 정당을 사물화(私物化)하고 국가대사를 그들끼리 밀실에서 결정한다. 공익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투명성이 없고, 역시 공익에서 가장 핵심으로 하는 바름이 없다. 정치인만이 아니다. 가장 공정해야 할 검찰도 그러하고 사법부도 그러하다. 늘 보도되는대로 '그들 밥그릇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영락없는 '경제적 동물'들이다.

국회 원내 교섭단체 구성요건이 현행 20인 하한선에서 10인으로 떨어지는 국회법 개정안이 제출되었다. 정치꾼 행위 중에서도 가장 치졸한 행위다. 새 천년을 맞아 '새 정치'를 해보라고 국민들이 만들어준 의석수를 경제적 하등동물들이 정상배 거래로 뒤집어 놓고 있는 것이다. 2천수백년전에 제창된 그 '정치적 동물'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경제적 동물'에 머물러 있으니, 우리 정치발전에는 그 기나긴 세월도 수유(須臾: 잠시)에 지나지 않는가.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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