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경제성장이라는 외길을 열심히 닦고 있을 때 그 진동으로 인해 길 한 켠에 선 우리의 가치관인 돌탑은 조금씩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천년의 세월을 버텨온 돌탑이었지만 '개발'의 기치 아래 수십년 째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자 마침내 중심을 잃고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장'이라는 달콤한 열매에 도취된 사람들은 탑의 기단이 무너지는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침내 외환위기가 닥쳤다. 외국으로부터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그 중의 하나가 한국이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에 빠졌다는 것이다. 완곡하게 표현해서 그렇지 쉽게 얘기하자면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는 아주 자존심 상하는 말이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 충(忠)과 효(孝)를 바탕으로 한 도덕군자의 나라가 아닌가.
확산되는 도덕적 해이
그런데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니.... 그 무례한 지적에 가소로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남의 나라 경제문제를 논하면서 왜 그 나라의 도덕성까지 들먹이느냐고 반문해 봤지만 그것도 잠시, 생각해보면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지적한 도덕적 해이는 사회적인 도덕성이 아닌 경제적인 도덕성이 상실됐음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수십년 밖에 안된 일천한 자본주의 역사 탓으로 인해 경제적 도덕성을 수립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자기반성이 없다 보니 그 부작용들이 도처에서 불거지고 있다. 자본주의를 대부분 '금전 만능주의'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내것 내 맘대로 하는데 참견하지 말라"는 식이다. 그렇다보니 부(富)를 창출하고 이를 축적하게 해준 사회의 기능은 뒷전이고 소유만을 추구하는 배금주의(拜金主義)로 치닫고 있다. 천민자본주의가 어느덧 우리의 안방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자본주의는 근면.금욕을 바탕으로하는 청교도 정신에서부터 출발했다. 중세 종교개혁이 절정에 달할 무렵 프랑스 신학자 칼뱅(Calvin)은 '도덕과 규율'을 부르짖었다. 즉 부패한 사회는 상층에서는 도덕이, 하층에서는 규율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경건한 생활을 해야하며 그런 사람은 내세는 물론 이미 현세에서 신으로부터 구제받도록 약속되어 진다는 '예정설'을 내세웠다.
청빈과 근면은 경제의 뿌리
그의 사상은 당시 상인 중산층과 신흥 시민층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으며 이들이 주축이 돼 이끈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로 성숙해 간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칼뱅의 정신이 자본주의를 낳은 정신적 토대가 됐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근검.청빈과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자본가가 드문 것은 이같은 청빈정신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뿌리없이 열매만 찾다보니 자본주의의 '알맹이'를 제대로 보지 못한 탓이다.
그런데 최근 IMF 졸업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도덕적 해이'라는 불쾌한 용어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문제는 이같은 용어가 이번에는 외국에서가 아닌 국내.지역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고위층과 경제귀족들의 부패에는 어지간히 이골이 난 국민들이지만 최근 학계는 물론, 공무원 심지어 무공해 분야로 알려진 시민단체조차 도덕성이 의심받기 시작하자 허망함과 배신감으로 도덕성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도덕적 해이가 경제분야에만 한정된 줄 알았는데 사회 전반적인 분야로 번지고 있다니 도대체 우리 사회의 정체성(正體性)은 무엇인가. 게다가 잘못을 시인하기는 커녕 이를 호도하려고 거짓변명을 늘어놓는 그들의 작태는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도덕 재무장할때
해저드는 한번 빠지면 탈출하기가 어려운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서 빠져 나오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깊은 해저드로 자꾸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아 도덕적 해이가 아닌 도덕적 단절(斷絶)로까지 연결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마키아벨리조차도 지도자가 필요한 3대 조건 가운데 도덕적 우월성(virtue)이 행운(fortune)과 시대적 요구(necessity)보다 우선한다고 했다.
이제 우리는 '성장'을 희생해서라도 길 한켠에서 쓰러져가고 있는 돌탑을 손질해야 한다. 그래야 또 천년을 거뜬히 버텨나갈 수 있는 우리들의 돌단을 쌓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윤주태(출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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