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전선-3)유학산 격전

입력 2000-06-02 14:19:00

유학산(遊鶴山). 다부동전적기념관(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을 동서로 길게 에워싼 장엄한 산줄기. 옛 격전지를 찾은 김기선(73·당시 3대대 10중대 하사·광주시 거주)씨는 6월의 신록이 더 서럽다.

격전지 순례 탐사로 조성을 위해 칠곡군이 주차장을 닦아놓은 팥재에서 바라본 주봉 839고지. 그곳에 서면 50년전 여름의 포성과 비명 그리고 죽음이 떠오른다. 김씨는 그래서 유학산 기슭의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에도 전우들의 넋인양 옷깃을 여민다.

"저기 학바위 쪽이던가…?" 국군 1사단 12연대 3대대가 인민군과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벌였던 839고지 아래 바위절벽을 가리키는 김씨. 그가 들려주는 애잔한 전장일화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서려있다.

낙동강 건너편에 융단폭격이 감행된 다음날인 17일 새벽, 방심끝에 고지를 빼앗긴 3대대 장병들이 울분을 삼키며 하산하는 중이었다. 어스름이 걷히자 정상 부근 너럭바위에서 인민군 병사들의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울화가 치민 10중대 1소대장 김병곤 중위(육사8기·중령예편)가 갑자기 옆에 선 연락병의 M-1 소총을 낚아채더니 정상을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 순간 "딱쿵~"하며 산자락을 울리는 총성과 함께 인민군 병사 한명이 비명을 지르며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그런데 김 중위가 얼핏 본 그 병사의 모습. 영락없이 고향인 평북 의주에 두고 온 셋째 동생이었다. 그는 "내동생이 아닐 것"이라며 애써 부인해 봤지만, 어릴때 함께 뛰놀던 애틋한 아우의 모습이 내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중대장의 가슴앓이에 병사들의 심중도 처연해졌다. "도대체 왜 이런 전쟁을 해야만 하는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적병을 사살하고도 가슴이 미어지는 전쟁. 그것이 그해 6월에 이땅에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이무렵 1대대 작전장교였던 육장균(육사7기·소장예편) 중위는 전선으로 투입되는 학도병 중에서 고향인 충북 영동의 같은 마을 중학생 두사람을 만났다. 반갑기보다 걱정이 앞서는 마음으로 손을 흔들며 전송을 했는데, 다음날 아침 두사람의 전사소식을 들어야 했다. 육중위는 유학산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동안 할말을 잊었다.

유학산은 왼쪽 주봉(839m)을 중심으로 837·674고지로 이어지는 대구방어의 전술적 관문이었다. 천평~다부간 5번 국도를 따라 대구 돌파를 시도하는 인민군 기계화 부대를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로 어차피 피아간 치열한 접전이 불가피했다.

837고지 탈환에 나섰던 12연대 1대대 참전자 송효석(73·당시 특무상사·광주시 거주)씨는 유학산 자락을 적시는 6월 시우비가 무명용사들의 흐느낌으로 들린다. 산등성이가 그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비목이다. 당시 12연대 1대대 1중대의 부대 재편성 실태는 이름없는 병사들의 무수한 희생을 대변하고 있다.

"내가 1중대장 이종철 중위다" 어둠이 짙게 깔린 산중턱. 갓 배치돼 올라온 30~40명의 보충병을 모아놓고 중대장은 손전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잠깐 비췄다. 이어 소대장들이 각 소대앞에 나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중졸 이상의 병사가 즉석에서 분대장으로 임명되고 중대장이 적정과 아군상황 및 땅재에 있는 대대구호소 위치를 알려주고 부상당하면 혼자서 내려갈 것을 지시했다. 다음에는 일렬횡대로 고지를 향해 M-1 소총 실탄 8발을 사격시키고 2, 3발의 수류탄을 골짜기로 던지게 했다. 그것으로 중대 재편성과 신병훈련까지 모두 끝났다.

"소대장이 화랑담배 껍질에 소대원 명단을 기록해 앞주머니에 넣고 분대원간 성명을 알려주고 나면 새벽 3시쯤 되지요. 신병들은 악착같은 모기떼와 시체썩는 냄새 때문에, 고참병들은 경계를 서느라 밤을 뜬눈으로 지샜습니다"

동이 트면 작열하는 수류탄과 비오듯 쏟아지는 기관총탄 속으로 무조건 돌격전이 감행됐고 지난밤 보충된 신병의 80~90%가 또 희생됐다. 1중대는 하룻밤새 소대장이 전원 전사하고 2·3중대에는 1명씩만 살아남았다.

3개 중대 병력이 80명으로 줄어들 때도 있었다. 소대장이 담배껍질에 적어둔 병사들의 명단은 피땀에 절어 사라지고, 분대원들조차 서로 이름도 모른채 죽어갔다. 매일 반복되는 죽음의 행진이었다.

다부동전사는 "백병전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8월18~22일간에는 전사상자가 매일 700~800명씩 발생하면서 전투경험이 많은 고참병의 손실이 계속 누적되었다"며 "특히 숲데미산~유학산을 공격하던 12연대의 상황이 혹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문에 사단사령부와 연대본부 고참 행정병까지 모두 일선 전투부대에 차출되자, 행정요원들은 학도병과 여학생들로 임시 보충할 수밖에 없었다. 전사자 명단과 병력파악이 제대로 될리가 없었다. 그래서 다부동 전투에는 무명용사가 많다.

피를 나눈 형제의 총탄에 쓰러진 무주고혼들. 그 죽음의 이유와 의미를 아직도 다 말해주지 못한 50년 세월. 그래서 유학산 전투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은 총성'으로 남아있다.-趙珦來기자 swordjo@imaeil.com

---전장의 노무자들

1사단이 낙동강 주저항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이후 전후방의 구분이 명확해지자 전투부대에 대한 보급품은 거의 노무자(보국대)들의 인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1개 대대에 평균 50~60명의 노무자들이 지원활동에 나섰는데, 대개 전투지역 인근 마을이나 피난민 수용소에서 동원된 40대의 농촌출신들이 많았다.

일명 '지게부대'로도 불린 이들은 매일 새벽 4시부터 밤늦게까지 전투원의 식사와 탄약을 비롯한 각종 보급품을 최전방까지 지게로 운반했으며, 돌아올 때는 부상자 후송에도 한몫을 했다. 가파른 산비탈을 타고 전장을 오르내리던 노무자들은 더러는 포화에 희생되고 도망자가 생기기도 했지만, 고된 노동에도 병사들을 자식처럼 위로해 황량한 전선을 훈훈한 인정으로 감싸기도 했다.

참전 지휘관들은 "'우리애들이 피흘리며 싸우고 있는데…'라면서 60~70kg의 무거운 짐 운반을 마다 않았다"며 "앞서가던 노무자들이 총탄에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일선 중대에 보급품을 져 날랐다"고 회고한다. 이들이 2, 3일만에 가져온 주먹밥 한개가 3, 4명의 병사들이 나누어 먹어야 했던 눈물겨운 전선의 식사였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