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렬 세상읽기-자기 중심주의를 넘어서서

입력 2000-05-23 00:00:00

이번 레브로프라는 가수는 북극곰과도 같다. 그 우람한 체구에서 나오는 저음은 정말로 깊고 감동적이다. 바로 이 가수가 부르는 러시아 민요를 담은 CD를 사서, 대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술자리에 즐겨 부르던 '스텐카라진'을 새삼스러운 감흥과 함께 듣는다. 우리가 부르던 노래의 기사는 이러했다. "넘쳐넘쳐 흐르는 볼가 강물 위로 스텐카 라진 배 위에서 노래소리 들린다/페르샤의 영화의 꿈 다시 찾은 공주여 웃음 띤 그 입술에 노래소리 드높다/동 코사크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 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주린다/다시 못 올 그 옛날로 볼가 강은 흐르고 꿈을 깨인 스텐카 라진 외로웁다. 그 모습" 노래를 들으며 이에 대한 설명을 읽노라니 러시아 농민의 영웅 라진이 그가 이끄는 무리들의 반발로 인해 아내로 맞은 페르샤의 여인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하지 않는가. 그가 이끄는 무리들의 반발이야 그렇게 해서 잠잠해졌을지 모르지만, 죽임을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집단의 정서를 위해 개인이 이런 식으로 희생되어도 좋단 말인가.

그러나 생각이 이 지점에 이르자 그들은 우리와 다른 의식으로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닐까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무리든 부족이든 어느 한 집단의 일부로 살아가는 사람들, 따라서 개인이기에 앞서 집단의 일원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생각했던 사람들이라면, 우리의 상식적 관점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그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라진의 예는 접어두고라도, 고대 멕시코에서 사람의 심장을 꺼내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심장을 바치고자 하는 사람이 기꺼이 이에 응했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순장 제도가 일반화되어 있던 그 옛날에 순장을 당하는 사람들이 과연 어떤 마음으로 순장에 응했을까. 그들의 사회는 개인이 단순히 개인으로 삶을 살아가지 않던 사회가 아니었을까.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개인주의를 절대적 가치관으로 여기고 생활하는 우리에게 그와 같은 옛날 사람들의 삶이 이해되기 어려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제는 언제부터 개인주의라는 명분 아래 자기중심주의가 사람들에게 절대 불명의 가치관이 되었는가이다. 아니, 언제부터 '나만 빼고 다 망해라'는 식의 사고방식, 채만식의 '태평천하'에 나오는 윤직원 영감의 것과 같은 사고 방식을 우리가 따르게 되었는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개인에 앞서 사회라든가 민족을 앞세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나 먼저'라는 생각에 줄을 무시하고 새치기를 하거나 끼여들기를 하는 사람들, 나만의 이득을 위해 남들에게 사기를 치는 사람들, 집안의 영광을 위해 우리 집 아이만큼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일류대학에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우리 아이만은 고생해서 안된다는 생각에 뇌물을 주고서라도 자기 아이를 군 입대에서 빼내려는 사람들, 아이의 기를 살린다고 제멋대로 뛰놀게 내버려 두어 주변 사람들을 피곤케 하는 사람들,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아닌가를 반성해 보자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물론 개인을 앞세우지 않고 살아간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멀게는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 가깝게는 독재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섰던 사람들이 우리의 현대사를 장식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광주에서의 비극이 있은 지 20년이 되었다. 그때 피 흘리고 숨을 거두었던 사람들, 그 앞에서 어쩌지도 못한 채 고통스러워하던 사람들, 이들의 희생과 고통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들의 희생과 고통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 모두가 적어도 일상사에서나마 남과 사회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 이렇게 말하는 나는 얼마나 오만한 사람인가. 우선은 나부터 편협한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앞선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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