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선 사수의 서막

입력 2000-05-19 14: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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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3일 오후 낙동강 연안에는 가랑비가 내렸다. 피를 나눈 형제들끼리 죽이고 죽어야 하는 처절한 공방전을 예고라도 하듯 강물도 그렇게 흐느끼고 있었다낙정리(의성군 단밀면) 일대 낙동강변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국군 제1사단 12연대 장병들은 비내리는 강줄기를 바라보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이제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겠구나…"

◈◈"낙오병 원대복귀는 기적"

3·8선 서부전선 임진강 일대를 방어하던 1사단이 한강이남으로 철수, 300km의 후퇴를 거듭하며 이곳 낙동강에 다다른 것은 8월1일. 당시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白善燁·7 9)씨는 "한강을 건너면서 흩어진 4천~5천명의 낙오병들이 원대를 찾아 속속 복귀한 것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며 "짧으나마 실전경험을 가졌던 이 병사들이 낙동강 전선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고 회고했다.

밀리는 전세를 낙동강선에서 버티며 공세로 전환하려는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의 작전구상에 따라 1사단은 낙동강을 건너 북으로는 낙정리, 남으로는 칠곡 왜관에 이르는 하천 방어선에 투입된 것이다.

이때 왜관 이남에서 마산까지는 미군 제1기병사단과 제24·25사단 등 미8군 예하 3개 사단이, 1사단 방어지역인 낙정리를 축으로 동쪽 산악지역과 동해안까지는 국군 제6·8 ·수도사단과 3사단 순으로 방어선을 형성했다.

1사단은 7천여명의 병력으로 100리가 넘는 광범위한 지역에 실처럼 가느다란 방어선을 편 채 3배의 병력과 10배의 화력으로 엄습해 오는 인민군을 맞아 사투를 벌이게 되었다.

낙정리 일대 방어에 나선 12연대장 김점곤(金点坤) 대령(육사1기·소장예편)은 제2대대와 3대대를 좌우 전방에 배치한 채 인민군의 낙동강 도하(渡河)에 대비하고 있었다.

4일 오전 6시쯤, 안개가 걷히자 강 건너편으로 대규모의 인민군 병력과 강을 건너지 못해 노숙을 하고 있는 수백명의 피난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곧이어 백사장 위로 인민군들이 까맣게 몰려들면서 낙동강 도하작전이 시작되었다.

◈◈美폭격에 피난민 떼죽음

파죽지세로 남진을 거듭해온 인민군은 기세가 등등했다. 하천 장애물도 무시한 채 과감한 도하공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방어진지에서 사격자세를 취한 12연대 3대대 장병들은 방아쇠를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순간 "땅~" 소리와 함께 강 건너편으로 발사된 예광탄의 긴 포물선이 숨이 멎을 듯한 정적을 깼다. 이를 신호로 일제사격이 시작됐다. 강둑을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해맑은 모래밭과 강물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인민군 후속 병력도 집중포화에 산산이 흩어졌다. 기관총열이 벌겋게 달아 오르도록 계속된 사격으로 붉게 물든 강물은 수백구의 주검과 처절한 비명으로 뒤덮였다.

낙정리 주민 안승호(60·전 단밀면 부면장)씨는 "드넓은 백사장에 흩어진 거뭇거뭇한 시체들로 강바람이 불 때마다 악취가 진동했다"며 "강기슭과 마을에는 서울쪽에서 내려온 피난민들로 아수라장이었다"고 당시의 참상을 떠올렸다.

다부동구국전투사(국방군사연구소 편찬)는 '전투가 한고비를 넘겼을 무렵, 낙동강 상공으로 출격한 F-80 전폭기 2대가 폭탄과 네이팜탄을 퍼붓자 강 건너편이 일순 불바다로 변하며 수많은 피난민들도 화염속에 휩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8일만에 일단 총성 멎어

이무렵 제11연대 방어선인 해평면(구미시) 일대 낙동강변도 강을 건너지 못한 피난민들의 울부짖음과 아우성이 그칠 날이 없었다. 총성이 가까워지자 더러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강으로 뛰어들다 물살에 휩쓸리기도 했다.

강을 건너고 나서야 어린아이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린 아낙네의 통곡이 이어졌고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아랫도리를 벗은 것조차 잊은 채 허둥대며 강을 건널 지경이었다.

12연대에 이어 11연대는 해평 일대에서, 15연대는 왜관 북쪽 방어선에서 백병전까지 벌이며 진지를 사수하다 여드레 만인 12일 오후 8시 사단 작전명령에 따라 최후 교두보인 다부동 전선으로 철수를 하게된다.

잠시 총성이 멎었다. 화약연기 자욱한 전선은 태풍이 지나간 듯한 음산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곧이어 닥칠 처절한 전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趙珦來기자 swordjo@imaeil.com

▨한국전쟁 연표〈1950. 6. 25~9. 16〉

▲6. 25=전쟁 발발 ▲6. 28=인민군 서울 점령. 유엔 한국원조 결정 ▲7. 3=인민군 주력 한강도하 완료 ▲7. 4=인민군 수원 점령 ▲7. 5=미24사단 선발대 오산에서 인민군과 교전 ▲7. 14=한국군 작전지휘권 유엔사령관에 이관 ▲7. 16=한국정부 대구 피난 ▲7. 17=한국정부 부산 피난 ▲7. 20=인민군 대전(大田) 점령 ▲7. 28=인민군 영동(永同) 돌파 ▲8. 3=유엔군 낙동강 전선 진입 ▲9. 1=낙동강 전선 인민군 대구 목표 총공세 ▲9. 15=인천상륙작전 ▲9. 16=유엔군·국군 공세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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