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속에 비친 달을 잡으러 물에 뛰어들었다는 일화로 유명한 중국 당(唐)나라 시대의 시인 이백(李白)은 세속적 부와 명예를 초개처럼 여기지는 않은 속물(?)이었다. 벼슬을 얻기 위해 애쓰던 그는 마흔이 다 되어서야 한림학사라는 관직을 얻었으나 현종의 애첩 양귀비를 논한 시로 모함을 받고 관복을 벗었다. 이때부터 그는 술과 시를 벗삼아 본격적으로(?) 호방한 삶을 살았다. 고향으로 가던 이백은 낙양에 들렀다가 눈에 번쩍 띄는 시의 작자와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두보(杜甫)였다. 후세로부터 중국 역사상 불후의 시인으로 추앙받게 된 두 사람은 서로 보는 순간 '죽이 맞아' 1년여간 같이 술마시며 시를 짓고 돌아다니는 등 남다른 우정을 쌓았다. 그 후 그들은 평생동안 만나지 못하며 정치적으로도 다른 길을 걸었으나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만은 잃지 않았다. 이백이 탁 트인 호남아였던데 비해 두보는 고지식하고 진지해 대조적인 성격이었으나 서로를 존중하고 아꼈던 것이다.
케이블 방송대학TV는 6월부터 방송되는 '중국 시문학기행'을 통해 이백과 두보의 발자취를 좇으며 그들의 숨결이 어린 시안(西安)~난징(南京)의 오늘날 모습과 함께 그들의 삶과 문학을 소개한다. 이백이 사랑한 난징(당시 금릉)에는 그가 벼슬을 버리고 조정을 걱정하며 지은 시 '등금릉봉황대'의 봉황대가 난징직업학교로 바뀐 것을 비롯, 자주 올라 시를 짓던 자금산, 청년기 시절의 '놀이터' 진회하(양쯔강의 지류)의 현재 모습을 전해준다. 이백이 말술을 마시던 진회하는 오늘날 중국의 젊은이들이 캔맥주를 홀짝거리는 장소로 바뀌었다. 당나라 수도였던 서안에는 이백이 현종과 양귀비를 위해 시를 읊었던 홍경궁의 심화정, 양귀비가 목욕했던 화청지, '서유기'의 보관장소이자 이백과 두보가 쇠락해가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던 대안탑 등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두보가 피폐해진 민중의 삶을 묘사한 대 서사시 '삼리삼별'의 현장, 그가 묵었던 집, 그의 고향이면서 생가가 있는 정주, 두보와 이백의 만남이 시작됐던 낙양의 용문석굴, 태산, 소주와 항주 등이 함께 소개된다. 아쉬운 점은 시인의 감성을 움직였던 곳이 개발로 인해 옛모습을 잃고 공해에 찌들고 있는 안타까움도 전달된다는 것이다. 金知奭기자 jiseok@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