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산림인-8)한국제지 경주 임무소 이영우씨

입력 2000-05-15 14:22:00

산지 한평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산에 몸 바쳐 나무사랑을 일생일업(一生一業)으로 여기며 한 평생을 보낸 이가 있다.

40년에 걸쳐 수천㏊의 민둥산을 녹색공간으로 탈바꿈시킨 나무박사 이영우(65)씨.현재 경주에서 자신이 조림하고 있는 산 아래 마을 암곡동에 가면 엄한 산림 관리로 '독일병정'이란 별명을 가진 그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산림 이력은 한국제지가 산림사업에 착수한 지 30년이 지나던 해인 64년으로 돌아간다.

61년 경주시청 산림공무원으로 출발, 64년 산림조합 양묘임업기사로 근무하다 한국제지에 스카우트 돼 경주임무소의 조림 총괄책임자가 된 것이 그와 나무와의 본격 인연으로 이어진다.

소장으로 발령받은 그의 최대 임무는 당시 한국제지가 매입한 경주·포항지구 임야 4천㏊와 전남 순천지구 임야 500㏊를 비롯, 영덕·청송지구의 대부받은 국유림 2천200㏊등 총 6천700㏊(2천10만평)의 조·육림과 관리.

그러나 당시는 우리 경제사정이 말할 수 없이 어려울 때. 농촌과 산촌 영세농가들이 보릿고개 배고픔을 못이겨 도벌로 호구지책을 삼던 경우가 빈번한 때였다.

산림 관리 책임자인 그의 주 역할이 우선은 도벌단속과 산불 방지 등에 치우쳐질 수밖에 없는 상황. 자연 먹거리를 찾아 헤매는 인근 산아래 주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수 밖에 없었다.

"산을 가꾸고 지키는 데는 산아래 주민들의 협조가 절대 필요했습니다"

산불과 도벌 방지만이 조림에 성공할수 있다는 신념아래 그는 이같은 초창기 어려움 극복을 위해 산아래 주민들을 대상으로 청록계를 조직, 장학사업도 하는 등 마을주민과 유대를 적극 모색했다.

하지만 충돌은 이어졌다.

한번은 회사 사장을 비롯 중역들이 경주 사유림(社有林)을 순산하던 중 도벌꾼을 목격하고 이를 중지시킨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심야에 사장 일행에 폭행을 가해 사장에게 중상을 입히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 그로서는 낭패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회사는 물론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라도 도벌은 뿌리뽑아야 한다는 신념 아래 도벌단속을 더욱 강화한다.

직원도 종전보다 늘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벌방지와 산불예방에 주력하는 한편 더욱 효과적으로 단속하기 위하여 그를 비롯, 3명의 직원이 산림경찰에 임명되기도 했다.

또 책임구역제를 도입하여 서로에 대한 근무 평가와 토론, 잠복근무와 야간순찰을 벌이면서 도벌꾼은 구속송치를 원칙으로 했다.

이에따라 주민들과 알력과 충돌이 잦아지고 흉기를 소지한 원목 절도범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구속송치된 도벌꾼 가족들의 폭언과 악담에다 온가족이 굶어 죽게 됐다는 하소연까지…그럼에도 그의 의지는 여전했다.

산림보호를 위해선 인정사정없다는 뜻의 '독일병정'이란 별명을 얻은 것도 그즈음그렇다고 그에게 직업에 대한 회의와 실망감마저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러한 괴로움으로 부터 그를 벗어나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6·25전쟁 전에 북한에서 김일성대학을 나온 한 반공포로출신이 황룡동 배나무골에서 잡목을 도벌하다 구속송치된 사건이 그것.

직책상 어쩔 수 없이 도벌꾼을 구속송치 하였으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도벌꾼의 부인은 물론 여덟살과 다섯살 철부지 어린 것들이 겪을 고통으로 밤잠을 설쳐야 했다.

이튿날 그는 쌀 한말을 사들고 그 도벌꾼의 집을 찾았고 대구지검 경주지청을 찾아 딱한 사정을 전하자 다행히 10일만에 석방돼 지금껏 막연한 친구가 됐다.

그 뒤에도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하기 위해 비육우 50두를 사주어 사육토록 하고 251평 규모의 돈사도 지어 주었다.

초창기 도벌 단속에 주력하던 그는 조·육림 활동도 동시에 전개했다.

1차적으로 임상파악과 미림목지 조림을 위해 회사직원과 주민들중에 조림지도요원을 선발 나무심는 방법, 묘목취급, 식재인부 관리 등에 대해 교육을 실시했다.

65년 봄부터 본격 조림에 나선 그는 암곡, 덕동, 황룡, 화산일대 미림목지 166㏊, 포항 100㏊ 등의 조림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자신의 일에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후 경북 일원과 전남 순천지방을 누비며 소나무와 잣나무, 낙엽송, 리기다소나무, 전나무 등을 심는 등 회사 소유 임야 6천700여㏊를 그야말로 녹색으로 우거진 울창한 숲으로 채워지도록 매진해 나갔다.

그의 능력이 인정돼 회사 측은 90년 55세 나이로 정년퇴직하기 바쁘게 촉탁으로 그를 다시 채용, 임무소장역을 거듭 맡겼다.

나무를 키우는데는 지금껏 산림 현장에 따뜻한 점심 도시락을 날라다 주는 부인의 내조가 컸다는 그는 경주시내에 살다가 10년전 아예 조림지 아랫마을인 암곡동에 이사까지하며 부부가 동락(同樂)으로 함께 산을 지키고 있다.

촉탁이 되면서 월보수는 생계비에 불과하지만 가꾼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 뿌듯하고 사랑스러워 날마다 헤어지는 것이 섭섭해 산아래 정착을 결심했단다. 그에겐 자신이 관리하는 산이 가정이고 나무가 식구인 셈이다.

나무를 키우며 40년을 산에서 살고 있지만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는 그는 먼저 심은 나무가 벌써 30∼40년이 지나 아름드리로 자란 나무를 보듬으며 다시 태어나도 산과 나무와 함께 일생을 보내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경주·朴埈賢기자 jhpark@imaeil.com

---현실 안맞는 임업관련법

산림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나 우리의 산림정책은 정작 일반인들의 임업 참여가 쉽지 않은 여건이다.

임업을 장려한다는 취지로 제정한 임업진흥촉진법 시행령을 보자.

제 2조 '임업인의 범위'엔 3ha이상의 산림에서 임업을 경영하는 자로 규정해 뒀다. 또 임업경영을 통한 임산물의 연간 판매액이 100만원이상이어야 된다.

'독림가' 요건은 더 장벽이 높다. '모범독림가'는 300ha이상의 산림(대부받은 국유림 포함)을 경영하고 있거나 조림실적이 100ha이상이어야 한다. '우수독림가'는 각 100ha, 50ha(유실수의 경우 20ha)를, '자영독림가'는 20ha, 10ha(유실수 5ha)를 각각 모범적으로 경영하고 있어야 한다.

'임업후계자'도 5ha이상의 산림을 소유(직계존속, 형제 또는 자매 명의 포함)해야 한다. 아니면 10ha이상의 국·공유림을 대부받거나 설정받은 자, 3ha이상의 산림을 소유하고 산림청장이 정하는 임산물을 생산하거나 생산하고자 하는 자로 정해 두고 있다.

아무리 커트라인을 낮추더라도 자기 산이 최소한 3ha(9천평)는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일정 자본이 없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는 셈.

일단 이 같은 규정을 통과하면 담보 능력에 따라 독림가는 3억원, 임업후계자는 2억원이내에서 연리 3%의 저리자금을 5년거치 10년 상환 조건으로 융자받을 수 있는 등 다소 나은 여건이 펼져진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39만8천여명의 산주수에 평균 소유 규모가 2.5ha에 불과한데다 10ha이하 산주가 전체의 96%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임업인의 한계를 정한 이같은 임업진흥촉진법 규정은 현실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평가다.

이에 따라 산림 경영주체가 체계적으로 육성되면서 산주 수요에 부응한 다양한 산림경영 모델 개발과 보급 등의 당면 현안과 함께 법령을 손질,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임업인으로 대우받아 혜택권에 들도록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편 경북도내 독림가는 41명(모범 4, 법인 4, 우수 9, 자영24)이며 임업후계자는 99명이다.

-裵洪珞기자 bhr@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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