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길 나의삶-화가 변종근

입력 2000-05-10 14:08:00

어깨에 닿는 긴 단발머리, 까만 바지에 유니섹스풍 흰 셔츠, 까만 멜빵. 멋감각이 남다르다. 하지만, 여자구두처럼 리본 달린 납작한 구두에 맨 발….

"게이(gay)같아 보이지요? 그곳에서 이런 차림은 대개 게이들이죠. 더러 오해받기도 해요" 긴 머리를 일렁이며, 남의 속을 들여다 보듯 무심히 말하는 그.

변종곤(卞鍾坤·52)씨에게선 어쩐지 히피 냄새가 난다. 퇴폐에 절은 70년대풍 히피가 아니라 도회적 세련미가 넘치는 2000년대 뉴요커 히피.

지난달, 대백프라자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작품전시회. 끊임없이 찾아오는 옛제자들, 친구들, 관람객들의 인사에 답하느라 분주했다. "이번만큼 긴장되는 전시회는 없었습니다. 이것 준비하느라 당분간 다른 전시회는 취소시켰지요"

그는 잠시 아련한 눈빛으로 말했다. "5월에 큰 딸 다미가 결혼합니다. 그애의 결혼식을 앞두고 두 딸들의 가슴을 멍들게 했던 지난 20년을 작품으로나마 보여주고, 이해받고 싶었어요. 이번 전시회는 딸에게 주는 아비의 결혼선물이죠"

지난 70년대, 대구 대건고 미술교사 시절. 당시 이미 청바지에 높은 굽 구두, 어깨까지 닿는 긴 머리의 그는 튀는 차림만큼이나 자유분방한 사고의 작가였다. 그때의 한 에피소드. 대입예비고사 체력장 시험에 차출된 그는 젖먹은 힘을 다해 멀리뛰기 하는 학생들이 너무 가련해 보여 점수를 무조건 만점으로 줘버렸다. 나중에 혼이 났음은 물론이다. 그런 그에게 길거리에서 자를 들고 행인들의 미니스커트, 남성장발을 단속하던 이 사회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을 밖에.

그 무렵, 그의 그림엔 억압된 사회현실이 담겨지기 시작했다. 언론봉쇄를 은유하는 타이프라이터 연작, 철수된 앞산 비행장의 황량한 풍경…. 하이퍼 리얼리즘(극사실)의 작품들은 이색 소재와 독특한 표현기법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침내 78년, 앞산 비행장 소재의 작품으로 동아미전 대상을 차지했다. "사회고발성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감시당한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뒤를 밟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낯선 사람이 길을 물어와도 깜짝 놀랄만큼 예민해졌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막힌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없는거나 마찬가지. 긴장의 도가 극에 달했던 81년, 무작정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가족도, 직장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다. 사막에 떨어지는 기분으로 찾아간 할렘. "마치 내가 냉동식품이라도 된 것 같았다"고 그는 표현했다.

뉴욕의 백인들은 평생 근처에도 얼씬 안한다는 할렘. 거기서 3년을 버텼다. 가족을 매정하게 버리고 온 자신을 날마다 회초리로 때리는 심정으로 작업에만 매달렸다. 재료 살 돈이 없어 할렘 구석구석에 버려진 잡동사니들을 끌고 왔다. 커다란 검은 자루를 메고 다니는 그를 할렘의 아이들은 '블랙 산타'로 불렀다. 디 아트 스튜던트 리그 오브 뉴욕에서 공부하던 시절. 토큰 하나 아끼느라 100블록을 걸어다녔다. "죽음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 시절"이었다. 한 번은 누렇게 뜬 얼굴의 그에게 어느 교포가 커피를 한 잔 주었는데 잔을 든채 벌벌 떨다 그대로 정신을 잃고말았다. 깨어보니 포켓에 봉투 하나가 들어있었다. 돈 200달러와 '힘 내세요'란 쪽지. 그는 "내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기억"이라고 회상했다. 극과 극은 통하는 걸까. 너무 고통스럽자 차라리 인생은 살아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선가게에 취직했다. 퍼덕거리는 생선을 차마 자르지 못해 쩔쩔매는 그를 보고 주인이 배달일을 시켰다. 처음 배달나갔던 날, 누군가 동전 하나를 그의 손에 팁으로 올려놓았다. 훌륭한 예술가를 꿈꾸며 모든 것을 버린채 이역만리에 왔는데, 생선배달꾼이라니….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서 펑펑 울었다.

어느 날, 가게에 온 한 미국인이 벽에 걸린 그림에 관심을 나타냈다. 그의 작품이라고 했더니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알게된 화상 헬무트(허드슨리버 갤러리 & 컨서베이터스 대표)씨. 그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새롭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열렬한 후원자들도 만났다.

오브제 작업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변기를 작품화한, 독창적 아이디어의 마르셀 뒤샹과 사진을 회화영역으로 끌어들인 만레이는 그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그는 뒷골목 잡동사니들에서 버려진 역사와 슬픈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의 손길은 미다스의 손처럼 하잘것없는 폐품들을 새로운 생명력으로 반짝이게 했다. '과거를 주워 미래를 담아내는' 작업이었다. 그건 '절망' 속에서 '희망'을 건지려 했던 지난 날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담금질당할수록 쇠는 강해진다. 큰 어려움이 밀려올 때 그는 "어서오세요. 내게 한번 더 자극을 주세요"라며 오히려 고통을 껴안았다. 지금의 그는, 20년전 냉동식품 같은 모습으로 할렘에 들어섰던 변종곤이 아니다. 세계의 심장인 슈퍼시티 뉴욕, 수많은 예술가들이 명멸하는 그곳에서 그는 강한 자생력으로 뿌리를 내렸다. 지난 2월 뉴욕타임스는 무려 2분의1 페이지에 걸쳐 그의 작품세계를 특집으로 실었다. 유색인종 작가에 관한 기사로는 이례적인'사건'. 각지의 화랑과 컬렉터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러나 막상 그는 초연하다. "그냥 에피소드로 생각해야죠. 그러지 않으면 거기 묶여버려요"

쥐가 들락대는 할렘의 아파트에 살던 그는 지금 부자동네인 부르클린 브리지 근처에 산다. 흔해빠진 미국식 이름도 없이 변(Byun)이라는 이름을 고집하며. 밤낮없는 작업으로 시력이 극도로 악화, 한 쪽눈은 거의 시력을 잃었다. "나는 작업과 아이들, 어느게 우선 순위인지도 모르겠어요. 둘 다 너무 사랑하니깐요"

자신의 예술세계를 찾아 먼 길 떠났던 그. 과연 긴 헤맴끝에'그것'을 찾았을까? 그의 답은 의외다. "내겐 내 작품이 항상 불만스럽습니다. 뚫려진 부분들을 여전히 많이 보게 되거든요"그는 동양철학의 부족 탓일 거라고 했다. 문명충돌의 현장인 뉴욕에서 지금도 정체성 문제로 혼란을 겪는다고 했다.

최근작에서 두드러지는 나침반,추, 자 따위의 오브제들은 이질적 사회에 뿌리내린 자신의 삶의 방향, 존재 확인의 노력은 아닐는지? 어쩌면 그는 헬무트씨의 말처럼 어느 머나 먼 행성에서 지구라는 별에 떨어진, 호기심 많은 방문객(visitor)인지도 모르겠다.

-全敬玉기자 sirius@imaeil.com,사진·閔祥訓기자

---낡은것과의 조화 통한 물질문명 통념 깨기

'아하,이런 것도?'

변종곤씨의 작품 앞에서 관람객들은 몇 번쯤 감탄사를 터뜨리게 된다. 낡아빠진 바이올린, 첼로…. 머리에 가득 꽃을 얹은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가 거기 살아있고, 살바도르 달리의 그로테스크한 세계가 펼쳐져 있다. 상처투성이 나무 바늘꽂이가 인간의 골치아픈 머리로 은유돼 있고, 부서진 나무 의자엔 아담과 이브의 실락원이 옮겨져 있다. 십자가 위에 매달린 예수를 잠시 내려놓고(피곤할까봐) 대신 전구를 켜놓은 작품, 못자국이 숭숭한 뒤집혀진 액자…. 혼합재료(mixed media)의 거침없는 조화가 기발하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통념 허물기 또는 선입견 깨기.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진지하고, 우울하게 우리 생각의 허(虛)를 찌른다. 물질문명의 인간성 파괴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곳곳에 메스처럼 숨어 있다.

빈센트 반 고흐. 그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평생 1점의 작품도 안 팔린 가난 속에서 그토록 열정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그를 존경한다. 현대작가로는 20세기 현대미술의 철학을 정립한 요셉 보이스를 흠모한다.

"동양 정신으로 서구를 보는 날카로운 눈을, 작품 속에 담고 싶습니다. 현실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밝히는 수사관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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