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김용주(경북대 교수·진단방사선과)

입력 2000-04-12 14:04:00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LA로 출발했다. 짧지만 샌디에고에서 보낸 일주일이 방금 깨어난 꿈결같다. 저녁 햇살을 맞아들이는 언덕과 계곡의 집들이 정겹다. 끝없이 펼쳐진 태평양 바다 수평선 저편,되돌아 갈 곳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바다 위에는 투명하던 수평선이 지워지고 형태가 분명하지 않지만 무언가 신기루처럼 떠오르다 지워진다.

피로에 지쳐 깊은 잠에 빠져든 동료들의 얼굴과 짙푸른 바다 쪽을 바라보면 되돌아 갈 곳이 있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행복해진다. 청년 시절에는 막연한 그리움 때문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날이 많았지만 나이들수록 그리움의 실체가 하나 둘 분명해지면서 이제는 떠나는 것 보다 되돌아가는 것이 즐겁다. 그래도 손에 닿지 않는 무언가의 그리움은 남아 바다 쪽을 향해 눈을 뗄 수가 없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애태웠던 그리움의 실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색깔과 형태를 바꾸는 바다와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 물결에 반사되는 투명한 햇살처럼 수많은 기억들이 떠오르다 지워진다. 창을 열면 오월의 푸른 바람같은 꽃향기와 바다 냄새가 들어온다. 끊임없이 자동차의 물결이 양쪽 고속도로에 이어진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본래대로 회귀하는 삶의 단편들을 보는 것 같다.

바다 위로 햇살이 점점 가까와지면서 그림자 쪽에서부터 하나 둘 불이 켜진다. 언덕 위에 웅크린 관목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배 한 척 보이지 않는 바다는 어둠 속에 고요하다. 언덕 위의 집에서 별 빛처럼 돋아나는 불빛이 바다에 비친다. 저 광활한 바다가 한 순간 어둠에 사라지듯 되돌아가야 할 시간이 내게 점점 가까워 오는 것을 느낀다. 떠나보면 더욱 아름다워지는 내 삶의 뿌리와 기쁨이 있는 곳,그곳으로 나는 돌아간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 번도 그곳을 떠나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가벼운 꿈 속에서 떠나올 때 막 피기 시작한 목련이 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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