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북한을 방문했던, 중국 흥룡강성에 사는 50대 조선족이 인편을 통해 방북기를 최근 본사에 보내왔다. 본인이 신상을 밝히기를 꺼려 실명을 밝히지 않고 그 내용을 요약했다.
편집자
나는 지난 1월 함경북도 회령시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했다. 지난 90년 9월에 이어 두번째였다. 회령시는 중국 옌볜(延邊)과 통하는 육교가 있고 청진·평양으로 연결되는 철도가 있는 교통요충지이다. 김일성의 본처인 김정숙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2박3일간의 짧은 체류였지만 내가 보기에 회령은 지난 90년 첫 방문 때보다 도시 전체는 물론 사람들의 얼굴에도 활기가 없었다. 생활난 때문인 듯 했다.
지난해 이 지역의 농사는 그런대로 괜찮았다고 했지만 주민들은 식량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하루 두끼만 먹었는데 그마저도 한번은 죽으로 때우고 있었다. 옥수수나 감자·무를 구하기 위해 배낭을 지고 농촌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곳 사람들이 '홍콩시장'이라고 부르는 장마당(장터)에는 쌀 등을 팔고 있었지만 쌀은 1kg에 북한돈으로 75원, 옥수수는 1kg에 35원, 사탕 한알에 50전∼1원에 거래되고 있었다. 평균 월급이 100원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그들에게는 그것이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속도전떡' '감자쌀밥' '솔잎떡' 등 듣도 보도 못한 음식도 있었다. '속도전떡'이란 옥수수 가루를 고온에 팽화(膨化)시킨 후 그 가루에 물을 부어 반죽하여 만든 떡. 떡을 만드는 데 불과 몇분밖에 걸리지 않아 '속도전떡'으로 이름지어졌다고 했다. 나는 그 떡을 두번 먹고 변비가 생겨 혼났다.
옷과 신발도 모자랐다. 면화부족으로 솜옷생산이 중단되고 또 대부분의 천이 군복생산에 들어가는 바람에 일반 주민들은 천과 솜이 모자라 추위에 떨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중국산 내의를 살 때 몸에 맞는 것을 사지 않고 일부러 큰 것을 고른다고 했다. 큰 것을 산 뒤 팔소매나 하의 허리·발목부분을 끊어 장갑·양말 등을 만들기 위해서다. 행인들 대부분이 뛰다시피 걷고 있었는데 그것은 추위를 덜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회령역 앞에는 식당이 두 곳 있었지만 현지 주민은 이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고 밥과 국, 옥수수국수 외에는 팔지 않았다. 수산물 가게가 몇곳 있었지만 문은 열려있지 않았다. 이따금 미역, 소금절인 고등어, 소금같은 것을 배급할 때만 문을 연다고 했다.
교통은 아주 불편했다. 유류난 때문인 듯 다니는 차를 거의 볼 수 없었다. 나는 화물차를 못구해 5원을 주고 빌린 소달구지로 여행용 짐을 회령세관에서 시청소재지까지(약 28km) 옮겼다. 회령을 경유하는 나진∼평양, 나진∼청진간 열차가 있지만 시간은 거의 지켜지지 않고 연착하기 일쑤라고 했다. 깨진 열차 창문도 많았는데 그것들은 비닐로 가려져 있었다. 승객 상당수가 열차표를 끊지않고 타고, 보통 콩나물 자라듯이 빼곡이 서서 가는 가운데 소매치기범들까지 설친다고 했다.
회령에서의 이틀밤은 적막하기 그지 없었다. 친척집에 있는 흑백TV는 처음 켤때 화면이 나오다가 슬그머니 어두워지더니 끝내 영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친척은 전압이 불안정해 초저녁에는 TV를 보기 힘들다고 했다. 집집마다 낮은 도수의 전등을 켜 마치 촛불을 켜고 있는 것 같았다.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나라' 북한에서 이틀밤을 보내면서 나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없어진 줄 알았던 빈대와 벼룩·이의 공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리·宋回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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