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를 아는 그들이 아름답다

입력 2000-03-16 14:29:00

"물러날 때를 넘겨 머물지 않겠다"

우리나라가 4·13 총선을 앞두고 선거 열풍에 휩싸이고 있는 가운데, 세계 각국의 유명 정치인들이 잇따라 정계 은퇴를 선언, 신선한 감동을 주고 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위선'으로 끝없이 권력을 탐하는 노회(老獪)한 정치꾼에 익숙한 우리에게,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외국 정치인들의 은퇴 이유는 훨씬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지난주 있었던 메이저 전 영국 총리의 정계은퇴 발표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1979년 하원의원 당선 후 재무·외무 장관 및 총리(90~97년) 등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더이상 오를 곳 없는 정계 원로. 하지만 벌써 은퇴를 얘기하기엔 56살 밖에 안된 나이가 너무 이른 감을 줬기 때문이다. 더우기 그의 지역구 헌팅턴은 뒤 이어 출마할 사람이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을 정도로 그의 '정치적 아성'이기도 하다."20년간의 정치생활로 가족과 보낼 시간이 거의 없었다. 이제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 그의 은퇴 변이었다. 그러면서 길이 기억될 명언을 남겼다. "떠나야 할 때를 넘겨 머물기 보다 남들이 머물라고 말할 때 떠나겠다".

일본의 노정객 무라야마 도미이치(76) 전 총리와 이토 시게루(72) 사민당 부총재의 최근 은퇴 발표도 우리에게 뭔가를 되생각케 한다. 80살이 넘은 정객이 적잖은 일본. 이들도 얼마든지 정치활동을 더 할 수 있지만 스스로 물러났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기력과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더 이상 결단을 미뤘다가는 욕심쟁이 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라며 다음번 선거에 출마않겠다던 4년전 유권자와의 약속을 지켰다.

최고 정책통으로 평가 받으며 차기 당수 후보로 꼽혔던 사민당 이토 부총재의 은퇴 성명 역시 인상적이다. "국정은 젊은 세대에 맡길 수 있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의 부인 레이코(67) 여사는 1992년 뇌 지주막하 출혈로 의식을 잃은 뒤 8년째 전신불수 상태에서 투병하고 있다.

지난 7일 미 대선 예비선거 '슈퍼 화요일' 이후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 브래들이 전 상원의원이 보여준 '페어 플레이'도 정치 후진국에겐 경종이 됐다. 한치 양보 없는 치열한 선거전이었지만, 그들은 민심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 들였다.

매케인 상원의원은 성명에서 "공화당 유권자 다수가 부시 주지사를 대통령으로 선호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으며, 나는 이들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했다. 또 "부시 주지사는 나를 포함한 모든 미국인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상대를 배려하기까지 했다. 민주당 브래들리 전 상원의원은 사퇴 성명 발표 전 고어 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슈퍼 화요일'의 승리를 축하하고 지지 의사를 표시했다.

1998년 11월에는 미국 깅리치 하원의장(공화당)이 '중간선거'에서 패배한 뒤 의장직은 물론 하원 의원직에서까지 물러나, 미국 정치의 성숙도를 보여줬었다. "내가 하원에 남아 있을 경우 새로운 지도자가 성장하고 배울 기회를 얻기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은퇴 결심 배경을 설명했었다.

石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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