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향토출신 재일동포들-나카지마 중앙병원장 이태영씨

입력 2000-02-28 14:21:00

일본 도쿄와 인근 가나가와(神奈川)현의 경계 지역 가와사키(川崎)시에 있는 나카지마(中島)중앙병원은 소화기내과 전문치료 기관으로 환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이곳은 병원장이 한국인이어서 더욱 유명하다.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잡은 이 병원을 방문했을때 45년의 전통과는 다르게 입구에서 부터 고급 호텔을 연상케 할 정도로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어 시대에 맞춰 발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국인 의사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내과의원을 개원하고 오랫동안 고국의 무의촌 진료에도 나서는 등 평생을 인술로써 봉사의 삶을 살아온 이태영(李泰永.74)병원장.

기자가 대구에서 왔다고 하자 그는 해방 직후 대구 남산병원에서도 약 8개월 정도 근무한 적이 있다며 얘기를 풀어나갔다.

일본서 다니던 의과대학을 중도 포기하고 해방과 함께 귀국했던 그는 지금은 없어졌으나 덕산파출소 부근에 있던 남산병원에서 조수로써일했다. 시청 부근에 숙소를 두고 걸어다니며 출퇴근했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그후 그는 다시 한번 더 의사의 길을 걷기 위해 결심을 굳히고 밀항선을 탔다. 당시는 한국전쟁 직전이라 사회는 아직도 혼란기였다. 설탕 한부대와 고급 만년필 한자루를 갖고 7톤짜리 소형 어선에 올랐다. 한밤중 어둠속에 일본 영해로 들어왔다고 느꼈을 때 갑자기 엔진이 고장났다고 했다. 그때 화물선이 나타나 예인해 주겠다며 무거운 식량 등 모든 짐을 큰배로 옮겨싣고 출발했다. 잠시후 그 배는 줄을끊고 사라져 버렸다. 밀항선은 현해탄의 검은 물결속에 휩쓸리며 표류하기 시작했고 며칠을 굶으며 바다에서 신기루를 볼 정도로 고역을 치르다가 일본 경비정에 발견돼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는 다행히 외국인 등록증을 소재하고 있었던 관계로 악명높은 오무라(大村)수용소로 끌려가진 않고 풀려날 수 있었다. 큐슈(九州)지역거류민단 사무실로 찾아간 그는 동포 직원에게 만년필을 주고 숙식과 도쿄까지 갈 수 있는 여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때 같은 동족으로 부터 받은 고마움을 그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그후 천신만고 끝에 다시 쇼와(昭和)의과 대학에 입학, 어렵게 의사면허증을 손에 쥐었다. 이같은 첫번째 꿈을 이루기 전에 그는 이미 초등학교 졸업 직후 일본으로 건너와 어려운 생활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1925년 경북 구미시 장천면에서 가난한 농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15세때 아버지의 친구 소개로 경찰서에서 여행증명서를 받아 혼자 현해탄을 건너 왔었다. 고학생으로서 갖은 고생을 겪으며 학업을 계속한 끝에 한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나 해방과 함께 고향으로 귀국했었다.

1956년 한국인 의사로써는 처음으로 가와사키(川崎)시에서 내과의원인 중앙진료소를 개원했다. 그곳에는 해방전부터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지금도 코리아 타운이 형성돼 있다.

많은 재일동포들이 이 진료소로 몰려들기 시작한 이유는 한국말로 병 증세에 대해 쉽게 얘기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원장인 이씨가 가난한 동포들에게는 진료비를 받지 않고 치료를 해준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도쿄를 비롯한 인근 지방에서도 외래 환자들은 몰려들었다. 1970년에는 내과에서 다른 과목들을 확대해 중앙병원으로 규모가 성장됐다. 지금은 60여 병상을 갖추었고 일본인 의사 13명과 간호사 35명이 근무하고 있다.

최근 위수술을 받은 이 병원장은 건강에 조심하면서도 매주 월.수.금 오전 진료를 계속하고 있다. 아직도 그를 찾는 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1972년 부터 재일한국인의사회 초대 회장을 맡으면서 조국과 고향을 위한 봉사에도 앞장섰다. 10년 동안 회장직을 맡으면서 재일동포 의사들과 매년 한차례씩 한국을 찾아 무의촌 의료봉사 활동을 벌였었다. 당시 경제적인 빈곤 속에 농촌에서는 거의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역이 많았다. 무의촌 의료봉사날이면 진료를 받으려는 사람들로 교실에서 부터 운동장까지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다. 일본에서 건너온 의사들이 무료진료해 준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 지방에서까지 농민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7년 동안 경상북도 군위, 선산을 비롯 강원도 횡성군 오지까지 찾아다닌 봉사활동의 공로로 그는 정부로 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한편 일본 지역사회를 위해서도 학교 담당의사로서 30여년간 진료를 담당해 왔다. 그 공로로 98년 2월에는 가와사키 시장으로부터 외국인으로써는 드물게 보건 공로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일년에 두번씩은 꼭 고국을 방문한다. 82년부터 맡고 있는 대한 의사협회 고문으로서 총회에 참석하기 위함이다. 또한 성묘를 위해 구미시 장천면을 찾아 초등학교 동창들과 모임을 갖고 대구에도 들러 형 태주씨를 만난다.

가나가와(神奈川)현에 살고 있는 경북출신 동향인들의 모임인 경북회에서도 82년부터 99년까지 회장을 맡으면서 결속과 우애를 다져오고 있어 그의 고향사랑과 동포에 대한 깊은 마음을 짐작케한다.

朴淳國.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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