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들-남산2동 번개반점

입력 2000-02-10 15:05:00

"다른 사람들에게 내줄 수 있는 것이 자장면 밖에 없었지요"

후줄근한 옷차림 만으로도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하는 같은 동네 노인 김모(65)씨가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지나가며 "오늘도 자장면을 배달해 줄건가"라고 인사한다. 마침 거리를 내다보고 있던 대구시 중구 남산2동 번개반점 업주 박상봉(37)씨는 재빨리 "그럼요"라고 대답한 뒤 배달 맡을 어린이를 물색하느라 머리를 굴린다.

4평 안팎 누추한 동네 중화요리점 주방장 겸 업주지만 박씨는 남산동에서는 저명 인사다. 지난 한햇 동안 이 동네 독거 노인과 실직자 등 한끼 잇기가 어려웠던 사람들이 박씨가 제공하는 '자장면 한그릇'의 신세를 톡톡히 졌기 때문이다.

박씨는 지난 1980년 쯤 10대 후반의 나이로 중화요리 업계에 뛰어들어 잔뼈가 굵었다. 지난 1995년엔 그동안 모은 돈으로 비교적 목좋은 동인동에 중화요리점을 차리기위해 가게를 구하러 쫓아다니다 교통사고를 당한데다 동업자가 사업자금을 가지고 달아나는 기막힌 일을 겪었다. 그때의 절망감과 도움을 줬던 친지들에 대한 애틋한 심경은 박씨의 평생 밑천이 됐다.

그래서일까? 박씨는 지난해 1월 인근 교회에 일요일 마다 실직자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이 모이는 것을 보면서 어쩐지 '돕고 싶다'는 느낌과 함께 자장면이라면 큰 부담 없이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씨는 부인 서말순(27)씨, 최주식(35) 이정훈(31)씨 등 함께 번개반점을 꾸리는 직원들과 협의, 격주로 일요일 마다 교회에 모이는 실직자들과 동네 독거노인 등 100여명에게 자장면을 배달해주기 시작했다.

이같은 일이 알려지면서 이웃들도 박씨를 돕기 시작하는 등 훈훈한 인정이 동네를 감돌았다. 인근에 사는 이은혜(13·남산초교 6년)양, 이재완(7)군 등 동네 어린이들이 일요일 마다 번개반점에 나와 자장면 그릇을 잔뜩 얹은 쟁반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받쳐들고 교회와 독거노인들의 집을 오갔다. 다른 이웃들은 밀가루를 매주 제공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이에 힘입어 박씨는 최근 경기가 좋아지면서 교회에 모이는 실직자가 줄어들자 노숙자 자녀들이 모이는 쉼터에 매주 자장면과 탕수육을 배달해주고 있다. 박씨는 "뚜렷하게 누군가를 돕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며 "다만 어린 시절 몹시도 먹고 싶었던 자장면을 한끼가 요긴한 사람들에게 내 힘으로 줄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고 말했다.

李宗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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