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렬 세상읽기-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자고?

입력 2000-02-01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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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조차 영어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일 따름이지 법으로 정해진 공용어는 아니다. 그런 영어를 우리나라에서 공용어로 채택하자는 제안이 몇 년 전 제기되어 무수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데, 이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기세를 펴고 있다. 이런 제안을 하는 측에서는 인터넷 등을 통해 영어 사용이 날로 늘어가는 추세이어서 영어 공용화가 빠를수록 국가 경쟁력 배양을 위해 바람직하다는 논리를 편다. 심지어 지난해 말 어떤 신문사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영어 공용어 지정이 국가 경쟁력 향상을 위해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대답이 조사자의 거의 60%를 차지했다고 한다. 한편 모국어의 순수성을 해칠 것이라는 점에서 지나친 발상이라는 의견은 조사자의 40%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최근에는 일본의 총리 자문기관에서 영어를 제2의 공용어로 채택하자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가 나왔다고 해서 또 한 차례 떠들썩하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일본 역시 인터넷, 국제화, 정보화를 들먹이며 이제 영어를 국민의 실용어로 채택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필요하다는 논리를 폈다고 한다. 이웃나라 일본조차 그런 형편이니 우리도 가만 있을 수 없지 않느냐는 투의 주장이 모 일간지의 사설로 등장하기 까지 하였다.

이런 경향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올해 초부터 신문지상이나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영어 교육의 필요성을 외치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영어의 고도(孤島)'로 남아있음에 개탄하는 글도 나올 정도이다. 온갖 방송프로그램, 선전문구, 신문과 잡지에까지 영어가 난무하고 있는데, '영어의 고도'라니? '영어의 고도'보다는 '영어 공해의 현장'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적절할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 초등학교 시절서부터 영어를 배울 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영어로 말 하나만 잘해도 대학을 갈 수 있을 정도이다. 온갖 분야에서 온갖 사람들이 영어 공부에 온 정신을 쏟고 있다. 이런 마당에 새삼스럽게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자니?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면, 정말로 국가 경쟁력이 강화되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까.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도처에 엉터리 영어가 난무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한 예로 전철 안의 어떤 광고문에 'You are hazelnut, I am mocha'식의 표현이 들어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너는 헤이즐넛 커피를 마시고, 나는 모카 커피를 마시자는 뜻의 문장인 것 같다. 물론 우리말을 엉터리 영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될 것이고, 우리말과 영어를 함께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 그런 실수가 나왔는지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이 말은 어떤 뜻을 전하게 될까.

사정이 이럴진대,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한다고 해서 과연 국가 경쟁력이 제대로 길러질 수 있겠는가. 오히려 영어를 이른바 공용어로 채택하는 경우 자발적인 정신 식민지화를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일찌기 식민지 피지배자의 고통을 절감했던 프란쯔 파농(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 출신 의사이자 혁명가)의 말대로 식민 지배자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언어를 피지배자들에게 이른바 공용어로 강요함으로써 지배 구조를 공고히 하였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국수주의자가 되자는 뜻은 아니다. 언어의 순수성을 극단적으로 수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순수한 언어란 죽은 언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사람들일 수 있다. 실제로 외국어의 영향은 살아 있는 우리의 언어를 풍요롭게 해주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따라서 영어를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주장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제대로 된 외국어를 배울 방안을 강구하지 않은 채 특정 외국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자는 논리가 행여 끌어들일지도 모를 자발적인 정신적 식민지화가 염려될 따름이다.

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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