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세대 타령

입력 2000-01-24 14:15:00

이제는 거의 고유 명사화한 용어로 '4.19세대', '6.3세대', '386세대'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는 해당세대들이 겪은 사회적 함의가 숨어있는데,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를 겪거나, 혹은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역사를 주도했다는 그들 나름의 자긍심을 은연중에 자랑스러워 하며 자기들을 그렇게 불렀을 것이고, 또 그렇게 불리길 소망했을 것이다.

한편 '38 따라지''58년 개띠'역시 우리들에겐 생소하지는 않지만, 그 함의는 사뭇 다르다. 약간은 자조적인 뉘앙스가 풍기는 용어에서도 알수 있듯이 확실히 이들 세대들은 역사와 사회적 변화에 주체적으로 참여했다기 보다는 휘둘려 이들 세대들은 역사와 사회적 변화에 주체적으로 참여했다기 보다는 휘둘려 졌었다고 표현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들의 소극적이고 험난했던 삶만큼이나 왜소하면서도 자기비하적인 생각이 이 말에 집약되어 있다고나 할까.

나는 아버지 세대의 고통을 음덕으로 그저 무난하게 60.70년대 근대화 과정을 학생의 신분으로 보낼 수 있었다. 김치하고만 먹었을지언정 배 곯지는 않으면서 아버지 세대의 가난과 고통의 끝자락을 보아왔었다. 생각해 보면 사회적 참여를 외치면서도 항상 누군가 무엇인가에 죄송해야만 했다.

누군가 앞세대의 성취는 오히려 뒷세대에게 장애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난친 기대에 주눅이 들고 좌절하기도 하였다. 어떤 시인은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고도 했지만 386세대처럼 잔치에 초대받지도 못했을 뿐더러 N세대나 C세대처럼 제대로 외국어나 컴퓨터로 무장하지도 못하였다.

갑자기 웬 세대 타령이냐고?

사회주역이 된지 꽤 오래이나 위 아래에 치여 제대로 행세도 못하고 대접도 못받는 것 같아 나중을 위해서라도 미리 변명이나 해 두자는 심사라고 해야할까. 상대적으로 일찍부터 변화와 풍요를 맛보는 요즘 세대의 겉으로 드러나는 당당함과 자신감이 못내 부럽기도 한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권오상.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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