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우리 아이 돈으로 키워요

입력 2000-01-17 14:01:00

사회 각 분야에서 21세기와 새 천년에 대한 꿈그리기가 한창이다. 2020년이 되면…, 2050년이 되면… 머릿속으로도 따라잡기 힘든 속도의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하지만 지난 60년대와 70년대를 되돌아보자. 아니 8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21세기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장밋빛이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예측과 기대는 마치 빗나가기 위해 존재하는 듯 서기 2000년 우리의 모습은 20세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교육분야는 유독 더하다. 다소의 변화는커녕 제자리걸음만 하는 형국이다. 디지털이라는 대세의 작은 부분에 얼굴만 내밀었을 뿐 21세기 꿈그리기에도 열외자가 된 인상이다. 새 천년 교육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찾기 힘들다.

무엇이 문제인지,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지에 대한 진단을 시리즈로 짚어보면서 대안을 모색해본다. 편집자 주

'26개월 된 ○○, 배운지 석달만에 한글을 척척 읽어요' '만4세의 ××, 영어를 우리말처럼 해요'

흔히 보이는 광고문구다. 광고를 보는 상당수 시청자들은 "무엇 때문에 저리 빨리 공부를 시키나", "아주 특이한 경우겠지" 하는 반응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더 심각하다.

주부 이모(27·대구시 남구 이천동)씨. 전세 1천만원짜리 단칸방에 살고 있지만 지난달 300만원짜리 교구세트를 구입했다. 두살난 딸아이를 위해 고민 끝에, 부부싸움을 벌이면서까지 내린 결정이다.

"우리는 제때 공부를 못해 힘들게 살고 있지만 아이들에게만은 최고의 여건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주위를 살펴보면 잘 사는 집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집에는 100만원 넘는 교구세트를 다 갖고 있어요"

조기교육의 열풍은 갈수록 심해져 요즘은 주부들 사이에 열병처럼 번져 있다. 갓 돌도 되지 않아 한글과 숫자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영어공부 연령은 불과 얼마 전까지 유치원이었지만 지금은 만4세이하로 내려갔다. 태교도 문학서적이나 음악을 통한 방법은 보편적. 임신중 영어나 과학, 수학 등의 서적을 읽는 사람도 많다.한때 부유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몬테소리, 프뢰벨, 은물 등 유아교육 프로그램은 재산 유무에 관계없이 주부들의 필수과제가 됐다. 교구를 구입하고 지도교사를 들이는 부담은 아랑곳 않는다.

한 프로그램 지도교사는 "교구를 한꺼번에 사는 계층은 특이하게도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이분된다"며 "중류층은 부담 때문에 일괄 구입을 꺼리는 경우가 많아 다양한 방식으로 공략한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최근 교구를 대여해주고 지도교사가 방문하는 학습지 방식의 유아교육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주부들이 많다. 주부 조모씨(30·대구시 달서구 대곡동)는 "집집마다 다 구입하는데 모른체 할 수 없어 교구를 빌려 쓰는 방법을 선택했다"며 "그래도 월 5만원이상 들어가니 이만저만 부담이 아니다"고 푸념했다.

취재중 만난 주부들은 대부분 '불안'이나 '조급증'에 빠져 있었다. 이야기 첫머리는 대개 "이웃집 아이는…" "누구집 누구는…"이었다. "힘들어 죽겠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로 이야기를 맺는 것도 비슷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교육관련 비용은 대학생 수준을 넘나든다. 유아교육기관은 크게 공사립 유치원, 어린이집이나 놀이방으로 불리는 보육시설, 사설강습소 등으로 나뉜다.

정규 유치원은 전국에 8천900여개, 53만여명의 원아들이 있다. 어린이집은 2만개에 육박하고 있으며 수용인원도 60만에 이른다. 시장규모로 추산하면 연간 1조원을 넘어선다.

유치원의 경우 원비에 교통비, 간식비 등을 합하면 월20만원을 훌쩍 넘는다. 어린이집도 매달 15만원 이상은 꼬박 들어간다. 스포츠와 유치원 교육을 함께 받는 '유아스포츠단'도 부담은 그에 못지 않지만 예약을 해둬야 보낼 수 있다.

속셈학원, 태권도학원, 미술학원 등 사설강습소는 이미 유치원화 됐다. 비용도 유치원 못지 않을 뿐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강점이 있어 유치원과 경쟁이 뜨겁다. 이들 강습소는 미술이나 운동, 음악 등 특정 분야에 대해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치원에서는 하지 않는 한글, 영어 등을 배울 수 있어 주부들이 선호한다. 유명 유치원에 넣기 위해 엄마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던 매년 12월초의 풍경도 지난해는 찾기 힘들었다. 방학기간이 길다는 이유로 맞벌이 부부 자녀들이 사설강습소로 대거 옮기면서 유치원들은 방학기간을 대폭 줄이는 궁여지책을 내놓기도 했다.

학습지는 얼핏 큰 비용이 안 들 것처럼 보이지만 가계의 주름살을 늘리는데 한몫을 한다. 미취학 아동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학습지 시장은 연간 2조원 가까운 총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현재 전국의 학습지 회원은 5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학습지는 월 회비가 2만~3만원으로 저렴해 IMF시대의 덕을 톡톡히 봤다. 게다가 영어와 한자교육 붐이 급속도로 일어나면서 최근 1, 2년 사이 이들 과목 학습교재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이같은 조기교육 열풍은 공교육이 거의 공백상태인 현 상황에서는 결국 사교육비 부담과 직결된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취학전 공교육 투자는 1인당 연 1천450달러. 캐나다(5천378달러)의 4분의 1 수준이고 일본(2천476달러)에 비해서는 절반을 조금 넘는다. 전체 공교육 투자비 가운데 비율로 따져도 1%에 불과해 헝가리(14.3%), 프랑스(11.7%)는 물론 태국(1.8%), 중국(1.4%)에도 못 미친다. 이에 비해 사교육비 지출은 연간 10조원을 넘어서 세계 최고수준을 자랑한다.

이보다 더 어두운 통계도 있다. 지난해 현대경제연구원이 전국 기혼남녀 993명을 상대로 교육비 지출과 관련된 조사를 벌인 결과 전체 가계의 10.8%가 빚을 내거나 부동산, 주식 등 자산을 처분해 교육비를 충당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특히 월평균 소득 70만원 이하 저소득층의 경우 17.5%가 금융기관 대출이나 사채 등 빚으로 교육비를 메운다고 답했다.

사교육에 의존한 자녀교육이 안고 있는 또다른 문제는 부모들이 가정교육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잃어버리는 한편 교육의 당사자인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과거 자녀에게 '천자문'이나 '바른 생활'을 가르치는 부모도 있었지만 굳이 그러하지 않더라도 모든 생활의 중심에 서 있던 부모의 모습은 아이들에게 선생님 이전의 가장 큰 교육자였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교사 혹은 학습지 교사들이 차지했고 부모는 그저 방관자로 머물게 된 것이다.

막상 이를 받아들이는 아이들은 상처받기 쉬운 존재다. 타고난 능력과 기질이 얼굴 만큼이나 다른데도 문자나 숫자공부, 외국어 공부를 무리하게 시키다 보면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큰 것. 영어를 배우다 말더듬이 오고 뇌성장을 촉진시키려다 정서적 결핍이 오는 사례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 실제 이같은 증세 때문에 소아정신과를 찾는 환자도 늘고 있다.

돈이 있어야만 자녀를 제대로 키울 수 있고 돈이 아니면 자녀를 키울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푸념. 20세기를 살아온 부모들이 21세기에도 고스란히 안고 온 멍에다. 金在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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