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특경대원의 자서

입력 2000-01-15 00:00:00

정치범학살 진상규명 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 당시 대구지역 모일간지(6월11일자)에 실린 '어느 특경대원의 백서 '내용을 본사 취재팀이 요약했다.

당시 경북경찰국 특경대원 백모씨가 쓴 것으로 알려진 이 글은 재판 계류 중인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에 대해 집단학살이 자행됐으며 경찰이 가담했다는 사실과 학살 장소를 입증해줄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판단된다.

원문 그대로를 옮기려고 했으나 현대 맞춤법에 어긋나는 부분은 일부 수정했다.6·25사변 당시 나는 경북경찰국 특경대원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의 특경대 사무실은 바로 지금 동대구서(칠성동) 자리였다.

6·25 사변이 발생한지 근 열흘이 된 어느날 아침 갑자기 비상소집이 내렸다. 나를 포함해서 약 20명 쯤이었다. 우리는 방향 조차 모르고 명령하는 대로 트럭에 올랐다. 물론 실탄을 가지고!

그래서 도착한 곳이 바로 삼덕동 1번지의 붉은 벽돌담 안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형무소 광장에는 이미 한복을 입은 약 200명의 남녀노소들이 멋대로 수염이 자란 얼굴로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고 맨앞에 선 형무관이 소리를 높여 호명할 때 마다 모기소리 만한 대답을 한 뒤 한쪽 편으로 몰려서고 있었다. 또 옆으로 나선 사람에게는 형무관들이 광목을 찢어 접은 것으로 눈을 가리고 손목엔 '고랑 '을 채운 뒤 포승으로 엮는 것이었다.

이윽고 집행장소의 입구인 가창골 광산(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상원리)에 도착하여 전원을 하차시키고 열을 세우자 갑자기 여자가 통곡을 했다. '나으리 ' '나으리 ' '살려주십시오 ' 눈을 가린 두겹의 광목은 하염없는 눈물에 푹푹 젖어 양볼을 따라 흘러 내렸다.

비탈진 오솔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서 사태로 무너진 골짜기에 다달았다. 30명을 한줄로 세우고 주위를 돌아보니 헌병과 경찰이 10여명이나 포위하여 감시를 하고 있었다. 권총을 든 헌병장교가 전열에 나서더니 '할말 없느냐 '고 물었다. 아무도 대답이 없다.

갑자기 도열한 열중에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달도 하나, 해도 하나 ' 그때 그시절에 부르던 유행가의 한토막이었다. 한 사람이 부르던 노래는 갑자기 화음이 되어 합창으로 변하여 메아리 쳤다. 그러나 메아리 치던 합창은 채 끝나기도 전에 일제히 쏟아진 총성에 지워져버렸다. 주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여전히 권총을 치켜든 헌병장교가 발로 시체를 뒤져가며 확인했다. 그리고 시체가 덮힐 정도로 땅을 파고 묻어 버렸다.

본대에 돌아오니 800환의 막걸리값이 배당되었다. 800환으로 취하란 말이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취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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