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신문지와 종이신문

입력 2000-01-14 14:15:00

경북에서 비교적 오지에 들어가는 청송군 부남면 화장리 무덤실에는 귀농한 가족이 사는 외딴집이 있다. 더러 내 집처럼 드나드는 그 집의 벽지는 그들이 귀농할 무렵의 신문지로 되어 있다. 컬러도 있고 흑백도 있다. 대통령도 있고 축구선수도 있다. 그들은 가로눕거나 거꾸로 있기도 하고 간혹 기울어져 있는 것도 있다. 심심하면 눈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낡은 이야기를 살핀다. 한참의 심심풀이는 되는 셈이다.

생각해보면 흘러간 한 시대의 가난한 삶 속에는 그런 벽을 한 이웃이 많았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의 신문지는 이렇듯 어려운 이웃의 훌륭한 자원이었다. 어설프기는 하지만 도배지 역할을 하고도 남았다. 불편한 점도 없고 그다지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땐 그랬다. 무엇을 싸는데도 신문지가 요긴하게 쓰였다. 고기를 끊어주는 식육점은 으레 묵은 신문지를 잔뜩 쌓아놓고 포장을 하였다. 그러면 비계에나 살점에는 어김없이 잉크가 묻어나 거꾸로 인쇄가 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나누어도 신문지가 앞장을 섰다. 호떡이나 번데기를 싸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뒷간의 일까지도 도맡다시피 했다.

그런 신문지를 요즘은 난데없이 종이신문으로 부른다. 아마도 컴퓨터를 활용하는 신문이나 책자형 신문이 등장하고 나서가 아닌가 한다. 신문 앞에는 굳이 종이를 붙이지 않으면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지금은 그것도 모자라서 종이신문의 위기라고까지 몰고 가는 세월이 되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종이신문의 지속성을 믿고 싶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도 아닌 복고주의라 핀잔을 듣더라도 종이신문이 주는 여러가지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하다못해 자장면 그릇을 덮어놓는데 쓸지라도 종이신문을 오래 보고 싶다. 보는 즐거움과 쓰는 즐거움을 전자신문 따위에 아직은 빼앗기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언젠가 무덤실 외딴집에 다시 도배할 일이 있다면 '신문지'를 잔뜩 들고 가야겠다.

안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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