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철신화 낳은 영욕의 철강왕

입력 2000-01-12 15:14:00

박태준(朴泰俊) 총리지명자는 '포철신화'를 이룩한 '철의 사나이'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정치인으로서도 4선의원에 구 민정당 대표위원, 구 민자당 최고위원, 자민련 총재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지만 경제인으로서 남긴 발자취가 더 뚜렷하기 때문이다.박 지명자는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시절인 1968년 산업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포항제철을 세운 '철강왕'으로 각인돼 있으며, 이는 새천년 초대 총리로 지명된 현재까지도 따라붙는 별명이다.

그러나 박 지명자의 정치역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27년 9월 29일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박 지명자는 육사 6기 출신으로 1961년'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에 발탁되면서 잠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박 지명자는 대한중석사장을 거쳐 1968년부터 포항제철사장으로 '철강왕국' 건설작업에 투신, 불모지였던 철강산업을 세계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놓았다.그가 정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계기는 1980년 신군부가 주도한 국보위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하면서부터다.

그뒤 박 지명자는 포항제철 회장을 겸임하면서 11, 13, 14대 등 3선 경력을 쌓았고 1990년 1월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에 의해 민정당 대표로 박탈되면서 정치의 전면에 서게 됐다.

그러나 '정치인 박태준'은 곧 시련을 맞게 된다. 민정당 대표 취임후 며칠만에'3당합당'이 이뤄졌고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의 악연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밑에서 김종필(金鍾泌) 현 자민련 명예총재와 함께 민정계 몫의 최고위원직을 맡았으나 199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씨와 맞서다 좌절하게 된 것이다.

박 지명자는 1993년 2월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더 큰 시련을 맞았다. 같은해 3월 포철의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한 것은 물론 수뢰 및 뇌물수수혐의로 기소된 것이다.이후 박 지명자는 일본으로 건너가 지난 1997년 5월 포항 보선 출마를 위해 귀국할 때까지 4년여의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이어 그는 같은해 7월 허화평(許和平) 전 의원의 12.12관련 형확정판결로 공석이 된 포항북구 보선에 출마, 당선됨으로써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1997년 9월 29일 김대중(金大中) 당시 국민회의 총재와의 '도쿄(東京)회동'을 계기로 이른바 'DJP연합'에 합류한뒤 야당후보 단일화 협상이 타결되자 같은해 11월 21일 자민련 총재직에 취임했다.

그러나 자민련 총재로서의 박 지명자는 또다시 영광과 좌절을 맞봐야만 했다. 자민련의 위상은 야당에서 여당으로 바뀌었으나 당의 목표이자 'DJT연합'의 연결고리였던 내각제 개헌이 유보되는 등 명암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이런 영욕을 거듭한 끝에 공동정권의 상징물인 총리직을 맡게되는 박 지명자는 이제 '경제총리'로서 또한번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약력

△경남 양산(72) △일본 와세다대 기계과.육사 졸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대한중석 사장 △포항종합제철 사장.회장 △철강협회장 △11, 13, 14, 15대 의원 △민정당 대표위원 △민자당 최고위원 △자민련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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