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매일신춘문예단편소설당선작

입력 2000-01-01 14:24:00

타인의 얼굴-이지영

그 강은 너무 차가웠다. 발은 상처 입어 찢어지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헐벗은 수양버들이 처연하게 드문드문 강을 따라 서 있었다. 나는 울면서 강가를 헤매었던가? 소리 죽여 흐느꼈던가? 모르겠다.

단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어둡고 서늘한 강가로부터 갑자기 퉁겨져 나왔을 때 나는 얼굴을 베개에 박고 온 몸을 둥글게 말아 스스로를 껴안은 채 떨고 있었다.

이불은 침대에서 방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있고 흥건한 땀이 차가운 방안 공기에 젖어들면서 식어간다. 멍한 눈을 힘겹게 떠 어두운 천장을 쳐다본다.

켜켜이 쌓인 어둠 때문에 천장은 검은 구름 덩어리들이 얼기설기 엉긴 채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다시 확인한 다음 천천히 일어나 컴퓨터 책상 위에 놓인 시계를 더듬어 찾는다.

플래시 버튼을 누른다. 언제나 처럼 새벽 다섯시다. 멀리 창 밖으로 귀에 거슬리는 높은 금속성의 마찰음이 들려온다. 방은 전철 역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철도 노동자들이 하루의 지루한 운행을 준비하는 소리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리모콘을 찾아들고 음악을 튼다.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가 방안 가득 퍼져 흐른다. 침대 반대편에 있는 어두운 화장대 거울에 내 모습이 비친다.

낯모르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처럼 낯설다. 어느날 5년을 매일 같이 지나다닌 지하철 역의 환승구가 너무 낯설어 어디로 나가야 할지 당황했던 날의 기억처럼.

그날 사무실에 들러 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지하철 역사 지하도는 너무 낯설었다. 입을 벌리고 있는 수 많은 출구 중 어느곳으로 따라 들어가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과 부딪혀가며 곳곳에 표시 되어 있는 붉은 방향표를 찾아 긴장감과 당황 속에서 지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야 했다. 가까스로 집으로 가는 전철을 갈아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옆에 서 있는 사람들 모르게 내쉬어야 했던 것이다.

기러기나 연어만이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자기가 떠나갔던 그 길을 따라 다시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자신이 깨닫지 못한 습관에 따라 움직인다. 비슷한 시간에 집을 나서고 많은 길 중에 익숙한 길을 지나 어디론가 찾아간다.

그리고 비슷한 길을 따라 비슷한 시간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사람은 일생에 적어도 한번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 가는 기러기나 연어와는 달리 한번 떠나온 고향을 다시 찾지 않는다.

서운해 하며 정든 집을 떠나고 다시 찾아 오겠다고 물기 젖은 눈으로 다정해진 사람들과 악수를 나눈 사람들은 다시는 정든 동네로 찾아오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살았던 집을 생각하지도 않게 꿈 속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어린 날의 모습으로 돌아가 아니면 지금보다 젊었던 그 날들로 돌아가, 한 때 지친 몸을 뉘어 달콤한 안도감에 젖던 옛집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체험한다. 그곳에서 젊은 부모와 어린 내가 웃고 싸운다.

잠에서 깨어나 그 꿈을 기억한다면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내가 무엇이며 어디에 있다는 것을 생각한 후에야 그것이 아름다운 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불현듯 아주 오래동안 의식속에서 그 정든 마당과 창문 밖의 풍경을 완전히 잊어버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서운함과 그리움이 가슴을 서늘하게 지나간다. 서서히 그 꿈도 잊혀진다. 다시금 예상치 않은 날 밤 그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낯설지 않은 것들은 대개 정겹다. 낯설지 않은 이의 얼굴.

땅속 깊은 곳으로부터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빛에 기대어 불도 켜지 않은 채 익숙한 방안 구석에 놓인 책장에서 익숙한 위치에 꽂힌 일러스트레이트 북을 뽑아든다.

침대 옆에 놓인 제도용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 천천히 한 장씩 넘겨본다. 주제별로 세계 유명 일러스트레이터들의 그림들이 모아져 있는 책이다. 한장 한장마다 반질거리는 코팅 처리가 되어 있는 두껍고 무거운 책. 같은 주제라도 그림은 너무 다르다.

글이 글쓰는 이의 내면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그림도 화가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 대개의 경우는 그림이나 글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내면의 모습이 얼굴 표정이나 몸짓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선의 터치와 붓질에서 나타나는 각각의 개성들, 싸라기로 만든 비로 마당을 쓸어 놓은 듯한 칠감을 즐겨 보여주는 이도 있고 또 빻아 놓은 인골의 가루처럼 부드러운 파스텔의 칠감을 선호하는 이도 있다. 즐겨 쓰는 색감과 인물의 얼굴 표정, 배경도 그러하다.

사랑이라는 주제를 찾아본다. 어떤 그림은 뭉크의 '절규'처럼 아비규환의 지옥 한 구석을 훔쳐본 자의 얼굴을 그려 논 듯 어둡고 음울하다. 벌어진 입과 눈, 눈은 공포와 공허감으로 가득차 있다.

입 속은 어둡다. 검은 혀를 가진 입 구멍은 그 기저가 어디까지 미쳐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둡다. 환희는 때로 극도의 절망으로 변하기도 한다.

아니, 기쁨이 크면 클수록 절망도 깊다. 그리고 처음부터 절망 뿐인 사랑도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그림은 철모르는 아이들이 뭉개구름 두둥실 떠 있는 초록의 동산 위를 풍성한 노란 옷을 입은 채 뛰어가는 발랄함을 표현하고 있다.

자세히 그림을 들여다 본다. 눈 가까이 책을 끌어다 댄다. 선명하게 파란 파스텔톤 하늘을 자세히 보면 멀리 풍선들이 날아가고 있다. 아이들은 그저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풍선을 찾아 뛰어가는 것일까?

이 사람은 결국 사랑이란 내가 갖지 않은 것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원래는 내 것이었으나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이 아이들은 무엇을 잃어버렸단 말인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함께 무지개를 찾아가듯 오색 풍선을 찾아 뛰어가는 그림일까? 피식 웃는다.

내일 오전까지 모 회사의 다음 달 사보 겉표지를 그려줘야 한다. 아무리 단순해 보이는 그림이라도 한장의 일러스트레이트를 완성하는 대에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 너무 여유을 부리고 있었다.

오늘내로 단지 머리 속에만 맴돌고 있는 무엇을 그림으로 그려내야만 한다. 3월의 이미지는 사랑, 회사의 이미지 마크가 나타내는 의미는 화합, 내 그림을 그리고 싶다.

경제적인 이유로 전공을 순수 미술 대신 시각 디자인을 택해야 했다. 평생 하얀 캔버스에 그림만을 그리며 살기엔 나는 가난했고 갑자기 부자가 될리는 만무했었기 때문에, 단지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림을 떠날 수는 없었다.

한 장의 사보 표지는 몇 십만의 돈으로 돌아오지만 그림은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거쳐 사보와 함께 쓰레기 통으로 들어갈 것이다. 겉표지를 주의깊게 보는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더군다나 겉표지를 그린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한 사람을 없을 것이다.

나의 그림은 거대한 산업사회 메커니즘의 아주 작은 일부가 되어 일정한 역할을 마친 후 폐기처분 된다. 커다란 집에서 살고 싶다. 방을 나누기 위한 칸이 없는 집, 벽은 온통 하얀 캔버스가 되어 나는 자유롭게 벽에다 그림을 그릴 것이다.

주위를 돌아본다. 7평짜리 원룸 아파트. 싼가격의 전세로 얻은 남의 집이다. 집으로 들어올때 집주인은 집을 깨끗하게 써줄 것을 요구했다. 벽에 못을 받는것도 피했다. 그것마저 주인이 원한것은 아니다. 단지 그러고 싶었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나는 방을 무늬없는 하얀 벽지로 도배했다. 그림 한장 달력하나, 그 흔한 벽시계도 걸지 않았다.

단순한 침대와 앉은뱅이 제도용 책상, 이런 저런 책이 꽂힌 책장, 작은 화장대, 컴퓨터와 전화, 팩스, 그리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 이미 설치되어있는 개수대와 싱크대, 냉장고,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많지 않은 부엌용 기구와 용기들이 전부이다.

하얀 벽을 보면서 나는 자유를 꿈꾼다. 커피 한잔을 타기 위해 싱크대로 간다. 빌리홀리데이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CD가 다 돌아간 듯하다.

때로는 창작을 하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가 필요한 법이다. 그것을 그대로 베끼겠다거나 온전하게 그 작품을 훔치겠다는 의도가 아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보편성을 믿는 편인데 그것은 쉽게 말한다면 인간종이라는 종개념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수세기를 면면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작품들이 있다. 그것이 조형물이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사회의 물적 토대가 바뀌고 그에 따라 상상치도 못한 정신세계의 변화가 뒤따랐어도 그러한 작품들은 여전히 수세기 동안 변하지 않은 감동과 공감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더 쉽게 말하자면 사람들에게는 아니, 인간 종에게는 수십세기를 거쳐도 변하지 않는 어떤 모종의 원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아득한 기억 저 너머에 블랙홀처럼 버티고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의 저수지 같은 것.

그것은 두려운 곳이다. 때로는 환희가 넘치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이 광기에 빠진다면 아마도 그 어두운 원형의 블랙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 속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뒤섞여 버린다. 너와 나의 구별이 소멸한다.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시간을 단절점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지속으로 파악하지 않고 시간과 분과 초라는 단위로 나누어 분산시키고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말하는 것은 이러한 광기가 두려워서 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영원이란 모든 것을 순식간에 빨아들이는 저 검게 소용돌이 치는 블랙홀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시간이란 그렇게 지속하는 것이며 계속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재는 이 지속에 상처를 내고 거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일 것이다. 현재는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과거는 무형의 기억일 뿐이다. 사람들은 일기를 쓰고 크게는 역사를 만들어 남기지만 과연 무엇이 진실이었는지는 그것을 쓴 사람들조차 모를 것이다. 과거의 모든 것은 단지 알 수 없는 모호함의 신비속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미래는 결코 도래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 외에는 의미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일러스트레이트 모음집을 펼쳐본다. 그리고 내 머리속에 아련하게 맴돌고 있는 생각의 번쩍임을 잡아내기 위해 타인의 그림을 들여다본다. 때로는 낯설고 때로는 친밀한 타인의 그림.

일러스트리에트 북을 놓고 일어나 창가로 다가선다. 아직 채 식지 않은 커피 향기가 콧등을 부드럽게 스쳐지나간다. 2월 초순은 아직도 길고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겨울의 전형적인 날씨답게 정오를 넘어선 시간이지만 그저 잿빛의 이미지만이 하늘과 공간을 가르고 있다.

물론 이미 대지의 깊은 곳에서는 잠시 샘솟기를 멈추었던 도솔천이 서서히 흐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달콤하고 따스한 그 물은 대지의 깊은 곳을 천천히 흐르면서 얼어붙은 땅덩이를 녹이고 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창 밖으로 나가 손바닥을 땅에 대보고 싶다.

저 황막해 보이는 2월 대지는 이미 녹색의 씨를 잉태하고 있을 것이다. 땅은 따스할 것이다. 잠시의 냉기가 지나가면 따스한 기운이 손바닥을 거쳐 온 몸으로 번져 나갈테지. 생명의 따스함.

육개월전 이 오피스텔을 선보러 왔을 때 나는 7평 방안을 휘돌아 본 후 창가로 다가갔었다. 13층 건물의 9층에 자리 잡고 있는 창으로 전철이 통과하는 선로를 따라 높이 설치 되어 있는 방음벽이 보인다.

방음벽과 건물 사이에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10여 미터의 공간이 있다. 방음벽 안쪽 가장자리를 따라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듯이 강하게 뿌리를 대지에 박은 나무들을 드문 드문 볼 수 있다. 운이 좋은 녀석들일테지..

비록 전철이 지나갈 때마다 들리는 소음과 진동으로 온 몸이 매말라가고 있을 테지만 선로가 놓이고 역사(驛舍)가 생기고 이 오피스텔이 지어질 때까지 운 좋게도 뿌리가 뽑히지 않은 녀석들.

나는 그 황량한 선로와 나무들을 보고 이사를 결심했다. 나무에도 사고(思考)가 있다면 선로가 놓이고 역사(驛舍)가 만들어 지고 방음벽이 설치되고 건물이 지어질 때까지 하루 하루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에 떨었어야 했을 것이다. 죽음을 피하고 싶었을까?

운명이란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다. 공포가 극에 다다랐을 때, 아니 죽음이라는 미래의 사건, 결코 현재화 되지 않는 사건에 직면 했을 때 사람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 운명을 피해보려 몸부림치며 반항하는 것?

운명이 삼켜버리도록 기다리는 것? 자살이라는 것은 이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도전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보일 수도 있다. 다가오는 죽음에 반항하는 것,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죽어버림으로써 운명을 비웃는 것이다.

운명이 삼켜 버리지 못하도록, 하지만 그것은 역설이다. 나는 결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죽음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운명은 그렇게 나를 비웃는 것이다.나는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흔히들 말하는 예술적인 형상화로 추상화 시킬 필요는 없다.

사보 그림은 누구나 그 뜻하는 바를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단순하고 쉬워야 한다. 3월과 화합을 연결시키기 위해 나는 푸른 잔디가 깔린 언덕의 배경과 두 사람의 얼굴을 선택한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 본다. 유치하게 두 사람의 얼굴 위에 붉은 하트라도 그릴까? 나는 혼자 웃어 본다. A4의 일러스트보드 위에 날카롭게 깎아 놓은 B4 연필로 스케치를 뜬다. 둥근 동산을 하나만 그린다.

그 위에 두 사람의 얼굴을 그려본다. 흔한 구상이다. 얼굴을 반반씩 서로 섞어 본다. 피카소의 그림을 연상하면 된다. 입체와 평면이 교차하는 그림. 흔히들 사랑이란 두 사람이 융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다.

28년을 살아 오면서 때때로 나는 광적인 사랑의 감정에 빠지곤 했다. 사랑도 기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말에 따르자면 나는 참으로 사랑의 기술이 없는 편에 속했을 것이다.

모든 관계 맺음이란 일종의 인정투쟁의 변형에 불과할 뿐이라고 시니컬하게 말해주던 사람이 생각난다. 사람은 어떤 관계 맺음의 방식에서든지 지배당하거나 지배하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것을 사랑이라 믿으며 참아내든지 즐기든지 아니면 거부하며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면서 말이다.

나는 피카소식 얼굴 둘을 지우개로 지운다. 사실 이런 스케치는 이 사보 그림에는 어울리지도 않는다. 대신 두 사람의 전신 모습을 그린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서로를 바라본다.

두 사람의 전신 위에 피스 테이프(piece tape)를 정성스레 붙인다. 피스 테이프는 일러스트 레이트에서 인물이나 동물 등의 대상을 정교하게 그리고자 할 때 주로 사용된다. 피스 테이프는 떼고 붙일 때 종이에 손상을 주지 않는 테이프 입니다.

피스 테이프를 쓰는 이유는 배경을 자유롭게 색칠하고자 하는 것이다. 피스 테이프을 붙이고 피스 커터(piece cutter)로 인물 상을 따라 여분의 테이프을 정성스레 오려 낸다.

피스 테이프은 이제 대상물 위에만 붙여져 있게 된다. 그 위에 배경색이 인물상을 훼손 시킬 걱정 없이 자유롭게 색을 칠하면 되는 것이다. 배경을 끝내면 피스 테이프을 떼어내고 정교하게 대상을 색칠하게 된다.

나는 피스 커터로 두 인물상의 라인을 따라 여분의 피스 테이프을 잘라내기 위해 잠시 숨을 멈춘다. 마치 외과의가 신경 조직을 잇는 수술을 하듯. 갑자기 귀 뒤로 넘겼던 긴 머리카락이 얼굴로 넘어와 눈을 가린다. 머리 끈을 찾아 자리에서 일어선다. 너무 오랫 동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다리가 심하게 저려온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화장대로 간다. 화장대 구석에 이런 저런 장신구를 놓아두는 작은 은접시가 있고 그 위에 검은 머리 끈이 놓여져 있다. 강한 솔이 많이 박힌 둥근 빗을 들어 머리카락을 대강 빗어 넘긴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뒤로 묶어 본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다소 창백하다. 요즘은 밤마다 악몽을 꾸기 때문일 것이다. 악몽도 규칙이 있는지 비슷한 악몽을 꾸고 비슷한 시간에 잠에서 깨어난다. 악몽에서 깨어나 다시 잠이 드는 경우는 아주 운이 좋은 경우이다.

대개는 다시 잠을 자지 못한다. 늦게까지 깨어 있고 낮잠을 즐기지 않는 나는 수면 부족에 시달린다. 다시 '빌리 홀리데이'의 CD를 건다. 'I'm a fool to want you'빌리는 계속 노래 한다. 당신을 원하다니 나는 바보여요. 당신을 원하다니 나는 바보군요. 진실이 아닌 사랑을 원하는 것은 바보지요. 나는 계속 당신을 떠나겠다고 말을 하지만 그 순간 마저 전 당신을 원해요.

갑자기 따스한 커피가 다시 마시고 싶어진다. 가스레인지에 주전자를 올려 놓고 물이 끓는 소리를 듣는다. 물이 끓어 오르는 소리가 정겹다. 머리카락을 만져 본다. 부드럽다. 나는 비교적 얇은 머리카락을 가졌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장난을 좋아했다.

갑작스럽게 고통이 몰려 온다.담배 케이스를 열어 담배 한 개비를 꺼낸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다시 창가로 간다. 이번에는 창문을 열어 본다. 날카로운 겨울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잔머리가 날리고 담배 연기가 소용돌이친다.

고통은 나를 극한 곳으로 몰고 가곤 한다. 고통이란 단어쓰기를 즐겼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치기 어렸던 것일까? 살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것인가를 종종 체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던 것은 그로부터 연락이 끊긴 이후이다.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고 영혼은 산산 조각 나는 것 같았다. 나락으로 떨어져 내려가는 추락의 속도감 속에서 나는 비틀거린다. 나는 이 상황 속에서도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난다.

적어도 사무적으로 관계 맺는 사람들에게 나의 허약함을 보이기는 싫다. 그들은 잠시 내게 호기심을 보일 뿐이다. 나의 고통 따위에 관심을 보일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벗어나고 있다. 우습게도 그 방법은 고통을 적극적으로 껴안아 버리는 것.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의 부재를 인정 했을 때, 고통을 받아들임으로써 방기해버렸을 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담배가 다 타버렸다. 나는 마지막 한 모금을 길게 빨아 들였다가 뱉어 낸다.

아크릴 물감을 두꺼운 폐지에 짜 놓는다. 색을 만들기 위해 적당하다고 생각이 드는 색들을 섞어 본다. 색감은 사실 타고 나는 편이다. 그리고 훈련을 통해 체화 된다. 색을 섞는 작업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사람은 절대 기성 물감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원하는 색은 적당한 물감의 배합과 물의 혼합으로 나타난다. 잘못된 배합색이 그림을 망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배합이 잘된 색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물감 자체의 원색이 어색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섞어지는 색들이 그 자신의 고유한 색을 잃지 않으면서도 배합되게 하는 것이다.

한색이 다른 색을 압도하면 색은 곧 탁해져 쓸 수 없게 변해버린다. 먼저 투명한 아크릴톤 푸른색을 만들어 하늘에 칠하고 흰색을 이용하여 뭉게 구름을 그려 본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배경이 원하는대로 다소 몽환적으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초록색을 만들어 동산을 칠한다. 연하고 싱싱한 잔디가 잔뜩 깔려 있는 것처럼 표현해 본다. 부드럽다. 건강하다. 잠시 숨을 돌린다.

오랫동안 집중을 해서 그림을 그렸더니 팔이 아프다. 팔을 휘휘 돌려 본다. 어둡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드니 이미 해가 지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입구로 다가가 전기 스위치를 누른다.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고 갑자기 환해진다. 나는 잠시 그대로 스위치에 손을 올려 놓은 채 벽에 기대선다. 갑자기 환해진 방안이 일순간 낯설게 느껴진다.

이유도 듣지 못하고 그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끊겼을때, 나는 갑자기 친밀하던 것들이 낯설어지는 것을 체험했다. 그것은 아마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것들이 예민해진 신경 속에서 갑자기 선명하고 무거운 존재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 어느 순간 어떤 우연한 계기로 선명하게 시야에 떠올라 머리를 가득 채우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그 풍경은 이미 익숙하게 보아왔던 그 풍경이 아니다. 갑자기 새로워진 존재감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 나는 비로소 그를 처음으로 타인으로 인식했다. 이것은 쉽게 생각하는 의미와는 다른 것이다.

익숙해진 환경이나 사람들은 타인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 따라서 그 진정한 의미가 감추어져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환경이나 사람은 낯설기를 거쳐야만 새로운 자리 매김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은 변했다. 모든 것이 낯설어졌다. 그리고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거쳐 다른 모습과 의미로 친밀해지고 있다. 고통이나 죽음같은 것들이 어떤 공통성을 가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 자신의 무력감을 절감하게 한다는 것일 것이다.

고통이나 죽음 모두 외부로 부터 다가오는 것, 결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 고통이나 죽음은 다가온다는 의미에서 언제나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이나 죽음은 타인과도 어떤 공통점을 가진 것이 아닐까? 타인은 언제나 내게 이를 듯 말듯 하게 걸어오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타인은 내 힘의 무력함을 절감하게 한다. 나는 그를 어쩌지 못한다.

오늘 하루 종일 커피 2잔 이외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그것을 의식하자 갑자기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든다.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어 본다. 혼자 사는 사람은 먹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돌보아야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을 이기적이라고 하지만 아마도 그것은 관계 속에서만 드러나는 것이다. 혼자가 되면 사람은 자신 마저도 돌보지 않게 된다. 식빵과 잼을 꺼낸다.

오래된 빵을 후라이 팬에 구울까 하다가 그냥 먹기로 한다. 우유도 떨어졌다. 마른 빵에 딸기 잼을 발라 입에 가져간다. 입이 까칠하다. 차가운 물을 마셔본다. 물이 쓰다.

조심스럽게 피스 테이프를 떼어낸다. 이제 손을 마주 잡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만 색 칠하면 모든 작업은 끝이 난다. 마음은 갈색 톤으로 그들을 칠하고 싶다고 속삭여 온다. 하지만 사보의 표지는 밝아야 한다는 것이 기본이다. 나는 노란색과 붉은 색을 선택한다.

이제 여기에 흰색을 적당히 섞어 색을 파스텔톤으로 만드는 배합 작업을 해야한다. 두 사람의 표정을 살펴본다. 웃고 있다. 웃고 있군, 나는 피식 웃어 본다. 얼굴을 먼저 칠하고 싶다. 하지만 옷부터 칠하기 시작한다. 모든 일을 마무리할때가 가까이 오면 나는 멈추고 싶어진다.

완성이 두렵다. 끝을 본다는 것은 가슴 후련한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허전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후련하다는 것은 곧 비어버렸다는 것이고 무엇인가가 빠져 나갔다는 것이기도 하며 따라서 허전한 일이다. 모든 것을 무한으로 넘기고 싶다. 종결이라는 것이 주는 허전함을 느끼고 싶지 않다. 옷을 칠하고 얼굴을 칠할 차례가 왔다.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고 있다. 다정하게.

이 일은 내일 아침까지 회사에 넘겨야 하는 일이다. 화장대 위에 있는 알람 시계를 바라본다. 오후 8시다. 다소 여유가 있다. 나는 시간을 끌어보기로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손으로 주물러 준다. 얼굴을 손으로 비벼본다.

손과 얼굴을 비빌때 생기는 마찰이 주는 따스함이 전달된다. 잠시 그 따스함을 즐겨본다. 손을 얼굴에 대고 가만히 있어본다. 천천히 손을 뻗어 담배 한 개비를 케이스에서 뺀다.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길게 빨아본다.

어지럽다. 침대에 누워 본다. 흰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저 천장이 공허한 눈으로 쳐다본 그 천장이란 말인가? 요즘 들어 혼자 웃어 보는 일이 잦아졌다. 혼자 웃어본다.

타인이 고통이나 죽음과 같이 운명처럼 언제나 미래에서 다가오는 것이라면 그리고 내 힘으로 그를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그를 내게 이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언제까지나 평행선을 달려야만 하는 것인가? 사랑한다는 이유로 서로를 소유해 버리는 일은 사실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은 얼마나 빠른 몰락을 가져 오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다고 믿어 보는 것에 불과하다. 자기 체면에서 깨어날 때 사랑은 차갑게 식어 버리고 냉정하게 서로를 밀쳐 버린다. 다른 관계들과는 달리 나는 그에게 갑작스럽게 빠져들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내 사랑의 진실성과 특별함을 보증받고 싶어할지라도 사실 그 사랑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랑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친숙해졌고 서로를 소유했다. 서로에게 열광했으며 익숙해졌고 시들해졌다.

그는 정말 잘생긴 남자였다. 사랑에 빠진 나는 그의 미끈하게 내려오는 코와 빛나는 눈, 사랑하는 사람의 눈은 언제나 빛나 보이는 것일 지라도, 선이 곧은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잘생겼을 뿐 아니라 그는 매우 똑똑했고 이성적이었다.

영화를 보거나 가벼운 소설을 읽어도 늘 복잡한 비평을 건내지 않으면 못견뎌 하는 사람이었다. 불행히도 내가 가난했듯이 그도 가난했다. 아니다. 그가 부자였다고 하더라도 그는 나를 버렸을 것이고 설사 그가 똑똑하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그럴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유는 필요에 따라 만들어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늦은 밤, 희미한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없다면 1m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강화도의 구석진 국도를 돌아다니다가 순간의 실수로 깊은 논두덩이로 떨어질뻔 했던 날, 우리는 처음으로 강화도 낯선 여관방에서 함께 밤을 보냈다.

등골로부터 머리카락까지 오싹했던 죽음의 경험을 함께 한 우리는 묘한 동지의식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키득거렸다. 그러한 시작 때문이었을까. 먼훗날 그는 나와 죽음마저도 함께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그날로부터 3년이 채 가기 전에 나를 버렸다.

그는 어느날부터인가 별다른 이유없이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고, 조금씩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내 어떤 것이 그를 화나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멀어져 가는 그를 되돌리기 위해 온갖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한번의 전화 메시지로 그는 이별을 고했다.

사랑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추한 모습 보이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그는 그렇게 끝까지 자기를 걱정하며 이별을 고했다. 그에게 나는 가끔 꺼내보는 낡은 사진첩 속의 사진처럼 머리속 깊이 쟁겨둔 기억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나를 그리워 할 것이다. 가보지 못한 길을 아쉬워 하듯이. 어떻게 손을 써볼 시간도 없이 그는 유학비용을 보장받으며 결혼했고 신부와 함께 영국으로 떠나버렸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사랑이 무엇이라고 규정 내리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닌지 모른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속삭였을 때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옷을 칠한 색에 흰색과 물은 더 배합하여 아직 하얗게 남아 있는 얼굴을 칠할 준비를 한다. 얼굴, 서로 마주 본 얼굴, 나는 그와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얼굴을 만지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시달렸었다.

그것은 사실 얼굴을 만지는 것이되 얼굴을 만지는 것이 아닌, 마치 TV에서 보게 되는 4차원으로 통하는 문이 그러하듯이 어디론가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무한을 더듬을 수 있을것 같은 기분이었다. 몸은 자기를 표현하지 못한다.

마치 의자나 망치와 같은 도구들처럼. 얼굴만이 슬픔과 기쁨, 서러움과 허전함과 같은 감정을 타인에게 숨김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타인은 언제까지나 낯선 존재일 수밖에 없다. 타인은 결코 내가 내 안으로 완전하게 소유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낯선 이의 얼굴을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타인과 지금, 여기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친밀해진 타인의 얼굴들이 서로를 마주 봄으로써 서로를 자신의 소유물이 아닌,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얼굴 묘사를 한다.

둘의 눈을 강조해서 그린다.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그림을 들어 멀찌감치 놓고 바라본다. 그런대로 다 끝난 것이다. 시계를 본다.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다.

오늘 밤도 악몽을 꿀까?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아마도 나의 무의식은 아직도 저 멀고 먼 블랙홀의 혼돈 속을 방황하고 있나보다. 현재와 과거가 미래와 함께 뒤섞여 있는 그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떠나간 이유를 생각해 본다. 알 수 없다. 그것 역시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미래에서 오고 있는 사람. 사랑은 언젠가 다시 내게 이르게 될지 모른다. 마주 보고 있는 얼굴, 타인의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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