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이한동(李漢東) 고문이 29일 탈당함으로써 지난 97년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던 '9룡(龍)' 중에서 '5룡'이 당을 떠났다.
이로써 한나라당에는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이회창(李會昌) 총재와 이 총재를 적극 도왔던 김윤환(金潤煥) 고문, 경선결과에 승복한 김덕룡(金德龍), 최병렬(崔秉烈) 부총재 등 4명만 남게 됐다.
신한국당 대선후보 레이스는 97년 2월 '이회창-이한동'간의 당대표 경쟁으로 막이 오른뒤 이인제(李仁濟) 당시 경기도지사를 비롯해 김윤환, 이수성(李壽成), 이홍구(李洪九), 최병렬, 김덕룡, 박찬종(朴燦鍾)씨가 가세해 가열되기 시작됐었다.이중 김윤환 의원은 경선후보로 등록하지 않았고, 이홍구 전 총리도 도중에 포기했으며, 박찬종 전 고문은 이회창 총재측의 매수설을 주장하며 물러났다.
결국 6명이 나선 경선에서 이회창 총재는 이인제씨와 결선 투표를 벌인 끝에 승리했지만 곧바로 '경선 불복'이 터져나와 오히려 '본선'에서의 장애물로 작용하기도했다.
경선 이후 이회창 총재가 아들 병역문제로 지지도가 급락하자 이인제씨는 '후보교체'를 주장하다가 끝내 탈당, 국민신당을 창당했으며 박찬종씨도 대선 직전 이 총재와 결별을 선언하고 국민신당에 동참, 이인제씨 지원에 나섰다.
이어 이 총재의 대선 패배후 한나라당의 '핵분열'은 가속화됐다.
이홍구 전 총리는 주미대사로, 이수성 전 총리는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임명돼 여권으로 말을 갈아탔다. 이한동씨는 한나라당에 머물며 지난해 총재경선에 나서는 등 '권토중래'를 꾀했으나 실패, 비주류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보수대연합'을 내세우며 자민련행을 택했다.
결국 당시 신한국당의 대선 후보경선은 사실상 첫 '완전자유경쟁'이었다는 점에서 정당사상 획기적 사건으로 관심을 모았지만 결국 절반 이상이 탈당함으로써 역사적 의미가 퇴색하고 '경선 후유증'이 2년 넘게 계속되는 상황으로 이어진 셈이다.
특히 경선 승리자인 이 총재로서는 당주변의 가시같은 존재들이 사라짐으로써 당내 기반이 강화되는 계기를 맞았지만 '포용력 부족'이라는 정치력의 한계가 드러났다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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