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IMF위기의 근본원인을 '조립형 공업화'정책이 한계에 이른 때문이라고 지적했는데.
▲IMF위기를 경제개발전략과 관련해 분석한다면 조립형 공업화 발전정책에만 매달리다가 기술집약형 공업구조로 전환하면서 주춤하는 사이 위기를 맞은 것이다. 한국의 위기를 외환 수요·공급의 혼란에서 일어난 위기로만 보는 것은 너무 형식적이다. 보다 근원적인 것은 조립형 공업화 정책이 일단 성공을 거둔 단계에서 '개발 가공형'으로 수정, 기술혁신과 축적을 통해 한국형 공업화로 발전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근본구조의 변화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본다.
-60년대 이후의 경제개발 과정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한국은 자원과 기술이 원천적으로 빈곤한 상태에서 부득이 일본 등 기술선진국으로 부터 공작기계설비와 부품을 수입, 전자제품 등을 조립하여 수출을 늘려 왔다. 수출이 느는 것 만큼 수입도 늘어나는 추세였다. 또 엔고 등 외부환경의 영향으로 수출 의존정책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국내 생산업체끼리 과당경쟁까지 벌이는 상황이 벌어져 기술개발과 축적은 외면되었다.
-80년대 후반에 이뤄진 막대한 중복과잉투자가 위기를 예고한 것이라고 보는데.▲그렇다. 80년대 후반 막대한 투자가 이뤄졌고 90년대 초의 총투자는 국내 총생산의 40%에 이르렀다. 80년대 초의 중화학공업 재편을 가능케 한 70년대 후반의 과잉투자보다 훨씬 큰 투자가 행해졌다. 예컨대 한보와 삼미가 80년대 말부터의 철강,특수강의 활황에 편승코자 90년대 초에 막대한 투자를 했고 경제위기를 맞았다.
-한국의 과잉투자는 대량생산체제에 의한 수출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는데.▲한국은 풍부한 저임금 노동력을 이용해 노동집약적 조립형 산업으로 공업화를 시작하여 그 제품을 해외에 수출, 외화를 획득하고 이 외화로 설비와 자재를 수입, 다시 조립하여 수출하는 그런 순환구조다. 여기서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는 대량생산체제여야 한다. 그래서 한국의 공장은 국내시장 규모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큰 생산능력을 갖춘 큰 공장체제가 되었고 자연히 재벌과 대기업이 생성하게된 배경이 됐다. 또 품질 경쟁력을 위해 생산설비와 부품류를 생산기술과 함께 도입할 수 밖에 없었다. '기술빈곤의 악순환'이 예견되는데도 이런 일이 반복됐다. 여기에 재벌·대기업의 '규모의 경제'에 의한 과잉·중복투자가 상황을 부채질했다. 일본 등 기술선진국의 생산설비와 기술이 급속히 혁신·변화했기 때문에 또다시 앞선 기술의 것을 수입할 수 밖에 없고 기왕에 진행되던 국산화는 쓸모없는 것이 되는 등 악순환이 계속됐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한국이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엔고 때문이라고 보는데.
▲일본과 유사한 상품으로서 해외에서 활로를 개척해야 하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지속적인 엔고가 활로를 열어준 셈이다. 그러나 엔화의 지속적 상승은 한국이 공업화 전략을 수정,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한 면도 있다.
- 대만과 비교하면 어떤가.
▲한국은 10만개 이상의 생산능력이 있는 업체라도 20만개의 주문을 받으면 당장 시설을 늘리는데 대만은 자가생산분 외의 것을 동업자들에게 주문을 나누어 분담시켜 생산토록 한다. 대만은 수출보조금 등 정부의 특혜가 없고 저금리 등 정책금융의 혜택도 없다. 무엇보다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가 이뤄지지 않았고 자연히 중소기업 중심의 소량생산 다품종 체제로 기술경쟁에서 이기는 체제가 이룩된 것이다.
-한국이 중후장대형(중화학공업)에 집중 투자가 이뤄진 배경을 '인간관계의 네트워크'로 분석했는데.
▲한국적인 특수한 인간관계의 네트워크가 급속한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요인이 됐다고 본다. 친·인척 등 가족관계, 지·학연의 동창관계가 한국에서는 서로 신용을 담보할 수 있는 사람들의 집합을 형성해 왔다. 역대 대통령과 현재의 DJ까지 각지의 인간적 네트워크가 중심이 돼 통치기반을 형성해 왔고 특히 지연이 가장 큰 신용담보의 매개가 돼 왔다. 기업은 재벌을 포함해 거의 대부분이 동족기업인데 이런 가족관계에 지·학연이 복합적으로 얽혀 '기업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이런 기업 네트워크가 '통치 네트워크'와 결합하여 국가자원의 배분, 경제개발계획에의 참여, 금융분할 등이 쉽게 이뤄지고 이른바 '한국적 정경유착'이 규모의 경제로 나아간 것이다.
-이런 네트워크의 장점도 있을 법한데.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는데는 도움이 됐다고 본다. 한정된 자원을 집중화했기 때문에 규모가 큰 투자가 이뤄질 수 있었고 개발계획이 신용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입안되고 실시된 것인 만큼 정보의 유통과 합의가 쉬웠다. 기업도 권한이 수뇌부에 집중됐기 때문에 정부의 의향을 기업의 빠른 의사결정으로 신속하게 뒷받침했다. 이런 장점은 경제개발 초기에는 유용한 시스템이 될 수 있었다. 예컨대 대일(對日)청구권리금으로 포철을 건설, 그 이익을 국민에게 나눠 줄려는 계획같은 것은 장점일 수 있으나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 속에서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심화되어 경제위기의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등 부작용을 낳았다.
-재벌 구조 개혁의 방법과 전망은 어떻게 보는지.
▲YS시절 30대 재벌의 매출액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이전보다 오히려 10% 늘었다. 국제화·자유화 구호속에 공공 공사 입찰 등이 자유화되는 바람에 재벌들이 오히려 역량을 확장했고 중복과잉투자도 방치됐다. DJ의 재벌구조개혁은 방향은 옳으나 방법이 전통적이어서 문제가 있다. 금감위가 구조조정의 심판관 역할만 해야 하는데 빅딜 등에 관여하고 경기부양책에도 끼여 드는 등 제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재벌들도 결과적으로 정경유착의 당사자들인데 과거의 그릇된 관행을 인정하는 기반위에서 정부와 국민에게 분명한 약속을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재벌해체가 목적이어서는 안된다. 경제의 체질을 강화하는 쪽으로 구조조정이 이뤄져야 한다. 결국 중소기업 중심의 재편이 이뤄져야 하며 한국적 기술 시스템이 신장되도록 해야 한다. 요약하면'한국경제는 성장한다. 그러나 재벌의 비중은 낮아진다'는 이런 결과가 나와야 할 것이다.
-전후 일본의 재벌해체에서 얻을 교훈이라면.
▲전쟁전의 일본과 현재 한국 재벌의 구조는 전연 다르다. 한국은 폐쇄적 족벌 집단에 의해서 상호출자,상호지급보증 등으로 문어발식 선단경영체제인데 일본은 지주회사가 계열사들의 주식을 소유하며 경영을 간접 지배하는 형식이었다. 따라서 전후 해체명령이 났을 때는 이미 계열기업들을 전문경영인들이 맡아 책임경영을 해 온 터였기에 자연스레 분리 독립이 이뤄지고 마찰이나 혼란이 없었다. 한국의 재벌은 경제성장 과정에서 견인차 역할을 해 온 점도 평가돼야 한다. 특성을 살린 구조조정을 통해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하며 급격한 조치는 자칫 한국 경제의 뿌리를 흔들 위험이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구조개혁의 핵심은 기술혁신이 목적인데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최근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직접 투자가 줄고 있다. 임금은 비싸고 품질은 보장되지 않으니 중국이나 동남아로 투자 대상을 옮기는 것이다. 임금은 어쩔 수 없다 해도 품질, 즉 기술은 향상되도록 해야 한다. 한국은 지위가 오를수록 현장(작업장)을 외면한다. 현장에는 과장급만 돼도 나타나지 않는다. 요컨대 장인(匠人)기능인이 존중되는 풍토가 이뤄져야 한다. 정부 재정에서 기술투자비를 대폭 늘리고 민간 연구소 증설을 장려하는 한편 교육제도와 대학의 기능을 기술개발 쪽으로 재편해야 한다.
-대량생산체제의 한계를 인정하고 부품산업을 신속히 육성해 공백을 메워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는데.
▲98년 5월에 준공한 현대석유화학의 55만t 나프타 공장의 경우 96년 착공 당시 에틸렌 가격이 t당 1천 달러였는데 준공 후 t당 300 달러로 폭락해 생산할수록 손해만 보는 애물단지가 됐다. 물론 반짝경기가 한두번은 있겠지만 이런 것이 대량생산체제의 낭비적인 모습이다. 석유화학 분야에 대기업이 몰려 들어 90년 대비, 99년엔 무려 4.3배나 공장이 늘어 났고 모두 빚더미에 앉았다. 일본의 전자제품의 경우 전체 수출액의 65%는 이름없는 부품업체들이 생산한 것이다. 98년 한국의 반도체 수출액은 170억 달러인데 부품수입은 122억 달러에 달해 수출가의 7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반도체 강국인 동시에 세계 제일의 반도체 장비 수입국이 됐다. 이 구조를 깨야 한다. 부품산업은 장인정신과 이를 뒷받침하는 기업 구조의 산물이다. 완제품, 대량생산체제만을 바라보는 풍토를 바꿔야 할 것이다.
---정리·李東寬기자
▨경력
△동지사대 졸업·경제학박사
△아세아경제연구소 한국담당 연구원
△서울대 경제연구소 객원 연구원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
△도시샤대 교수(현)
▨저서
△한국의 경영 발전
△한국·대만의 발전 메카니즘
△기타 한국관계 논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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