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문화 파일-세기말의 거짓말 축제

입력 1999-12-25 14:32:00

일본 작가 스즈키 코지의 '링'은 원한을 품고 죽은 처녀의 염력이 투사된 비디오테이프를 소재로 한 공포소설이다. 저주받은 테이프가 바이러스처럼 인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내용. 특히 '행운의 편지'처럼 무작위로 자행되는 익명의 광포함을 비디오테이프에 대입시켜 풀어나가는 것이 일품이다.

◈영화'거짓말'파문확산

그런데 소설속의 공포가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인터넷으로, 비디오테이프로, CD-롬으로 급속하게 세포분열돼 퍼져나가고 있다.

장선우 감독의 영화 '거짓말' 이야기. 요즘 시내 사무실마다 "라이('거짓말'의 영어제목 'Lies'를 두고 하는 말) 봤어?"가 은밀한 인사말이 되고 있다. 인터넷 E메일에도 '거짓말 팔아요'라는 편지가 여기저기에서 들어오고 있다. '거짓말'은 세기말이 아쉬운 듯 또다시 제2의 'O양의 비디오' 파문을 재연하며 우리 사회의 집단 히스테리 증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거짓말'은 '링'의 죽음의 비디오 테이프처럼 자가분열하면서 몇몇 변시체(?)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선 제작사가 사망진단서를 받아놓았다. 불법 테이프가 돌자 제작사인 신씨네는 지난 12일 서울경찰청을 찾아가 진정서를 내고 수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O양의 비디오'처럼 실효는 없어 보인다.

칸영화제 출품작이란 뒷바람을 타고 국내 개봉으로 흥행 순풍을 타려는 당초의 의도는 물거품이 됐다. 두번째 등급 보류 기간이 끝나는 26일 이후 다시 심의 신청을 할 예정이지만 흥행의 뇌관은 이미 빠져버린 상태다. 또 '거짓말'의 유통구조가 'O양의 비디오'처럼 음란물의 모양새를 갖추면서 감독과 주연배우들의 얼굴도 먹칠됐다.

◈최대 희생자는 청소년

그러나 정작 최대의 희생자는 딴 곳에 있다. 바로 등급위(영상물등급위원회)가 그토록 이 영화로부터 차단시키려고 애쓴 청소년들이다. '거짓말'은 청소년들이 주 고객인 인터넷과 PC통신을 통해 무차별로 전파되고 있다.

청소년들에게 유해하다며 등급을 보류했던 영화가 청소년들에게, 그것도 노컷으로 제공되는 이 아이러니... 이를 두고 "등급위가 오히려 청소년보호법을 위반했다"는 비아냥도 일고 있다.

'거짓말' 파문은 합리적인 대안없이 기존 관념에 빠져있는 우리 영상 정책의 단면을 드러낸 것이다. 제작사가 심한 노출장면을 모자이크 처리했고, 지나치게 선정적인 장면이나 노골적인 대사들을 제외하고는 성인이라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 지난 8월 첫 시사회에서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등급위가 이를 위험물로 간주하면서 '음란등급'을 상향(?), 관객들의 촉감을 '성'에 집착하게 하는 실수를 범했다는 지적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등급위냐?"라는 질타도 여기에서 나온 비난이다.

등급 보류 1호 영화인 '노랑머리'도 이와 비슷했다. "흥행이 의문시됐던 '노랑머리'를 대박(흥행 대작)영화로 만든 것은 등급위였다"는 우스개까지 돌았다.

그동안 우리의 영상정책은 늘상 이런 식이었다. 온갖 외설적 요소가 가득한 에로영화라도 주요부분만 안나오면 버젓이 상영되고, 작품성이 있어도 노출이 심하면 무조건 막았다.

◈유년기 벗지못한 영화정책

막히면 터지는 법. '거짓말'도 극장 상영이 막히면서 지하에서 터졌다. 그런 점에서 등급외 영화관의 무산은 아쉬운 점이 많다. 등급외 영화관은 '오폐수 분리' 개념이다. 오수를 한 곳으로 흘러가게 함으로써 맑은 물이 살도록 하는 것과 같다.그럼에도 "동방예의지국에 포르노극장이라니…"라는 비생산적인 관념에 밀려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정수물과 오수가 한데 뒤섞여 생화학적 산소 요구량이 최악인, 그래서 어느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하향평준화된 환경이 되고 말았다.

'영상시대'라는 21세기를 코앞에 둔 시점. 여전히 유년기를 벗지 못하는 세기말 '거짓말 축제'의 우울한 단상이다.

金重基 문화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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