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경제학자가 보는 한국경제(4)

입력 1999-12-24 15:19:00

-지난 3일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지 2년이 됐다. 현 상황을 평가한다면

▲표면적 성장률이 10% 가까이 이르고 외환보유고도 700억 달러가 넘는다지만 경제 체질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고 본다. 올 11월 기점으로 지난 해 같은 기간보다 수출이 22% 늘었지만 수입은 배인 41%나 늘었다. 수출이 늘면 수입이 상대적으로 늘어나는 체질이 지난 20년간 계속됐는데 여전히 그런 구조다. 한국은 수출의존적 경제구조인 만큼 무역체질이 강해져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수출·입의 균형이 유지돼야 한다. 특히 1천500억 달러의 외채를 갚아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700억 달러 외환보유고도 안심할 수준이 아니다.

-현재의 외자유치와 관련, 함정이 있다고 지적했는데.

▲대기업의 경우 국내에서 자금 조달이 어려워 해외 조달 몫이 늘어나고 있다. 현재 1천500억 달러인 외채가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외국의 직접투자도 생각만큼 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지난 4월 자본자유화 조치가 시행돼 외자 유출이 용이하게 됐지만 정부나 민간에서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유출상황을 철저히 점검하는 시스템을 보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외국의 직접투자조차 단기성 차익을 노린 것이 많다는데.

▲그렇다. 미국투자은행(AIB)이 활발하게 한국 기업을 매수·합병하고 주식 투자도 하는데 담당자에게 확인했더니'한국 기업을 육성하기 위한 장기 투자보다는 2, 3년 정도 관리하다가 기업이 조금 커지고 경영 상태가 나아지면 팔겠다는 생각으로 투자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예에 한국은 유의해야 하며 따라서 외환보유고의 구조가 건전한 지를 잘 따져 봐야 할 것이다.

-최근 노동쟁의가 다시 국제적 관심을 끌고 있어 국가신용도 하락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는데.

▲결과적으로 살벌한 쟁의 현장의 모습이 전세계에 알려지는 것은 국가신용도를 떨어 뜨리는 것이 틀림없다. 지난 2년간 공공부문, 기업 등에 비해 근로자들의 고통이 심각했고 부담도 가장 많이 받아 왔다. 어떻게 조화할 것인지 지혜와 결단이 필요하다. 노동시장의 안정성없이는 그나마 외국의 단기성 투자부분도 빠르게 유출될 수도 있다.

-한국의 경제체질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기초공업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는데.

▲반도체 등 첨단산업의 기술이전은 간단하다. 이전이 어려운 것은 금형과 같은 기초기술분야다. 첨단 제품은 제조 과정의 시스템 전부를 이전받아 제품 생산을 할 수 있다. 반도체 메모리 분야가 그런 분야인데 3~5년이 지나면 사양산업이 되고 또 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비메모리 쪽으로 이전해야 하는데 쉽게 되지 않는 것은 고도기술의 금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금형을 기술에서 앞선 일본에서 수입해야 하는데 수익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은 요즘 일본보다'벤처'바람이 세게 불고 있는데 뭔가 헛짚고 있다는 느낌이다. 컴퓨터 등 첨단산업 만을 키운다고 경제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 컴퓨터를 만들어 내는 기초기술이 탄탄해야 하는 것이다.

-기술개발은 단기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닌데.

▲중국이 60, 70년대 한국이 차지했던 노동집약적 경공업 분야를 상당부분 잠식해 왔다. 한국은 앞으로 '한국형 기술'로 활로를 열어야 한다. 4천여 가지 세계 최고 기술 가운데 한국이 가진 것은 1%도 안된다. 그나마 낫다고 하는 정보·전자·통신분야도 8건에 불과해 미국의 2%, 일본의 3.4% 수준에 머물고 있다. 99년의 연구개발 투자비는 97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년의 국가적 연구 공백을 메우려면 5~10년이 걸린다. 2005년까지 현 상황에 획기적인 변화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범용품 분야는 경쟁력을 완전 상실해 수출할수록 적자만 쌓이는 위기가 올 수 있다. 중소기업 중심의 부품산업을 경쟁을 통해서 육성하고 장인(匠人)정신을 존중하는 교육제도, 연구원 중심의 산학(産學)협력을 강화하는 등 획기적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대구의 승리기계제작소가 워터제트 직기의 노즐을 개발했으나 모기업조차 사용하지 않았는데 일본제품보다 성능이 뒤진다는 이유였다. 대기업은 장인의 기술혁신을 위한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고 믿지 않으려는 풍토가 있는 것 같다.

-대통령이'기술비상령'이라도 발동해야 할 것 같은데.

▲뭔가 강력한 조치로서 기업, 국민의 생각을 깨우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드골이 충격 요법으로 국가 재정에서 과감한 기술투자를 했다. 결실은 퇴임후에 나타났는데 에어버스, 엑조세 미사일이 그 대표적 성과물로 프랑스가 지금 기술선진국 대열에 선 것은 그의 공로이다.

-한국의 기술 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한 일본과의 전략적 제휴를 할 분야가 있다고 보는데.

▲반도체, 자동차 분야를 생각할 수 있다. 반도체의 경우 한국이 메모리 분야는 강하기 때문에 일본에 수출을 늘리고 세계시장의 수급정보를 공유하면서 한국이 일본의 위탁생산을 담당해 간다. 그러면서 서서히 한국은 비메모리 부문을 강화해 가는 전략적 제휴를 하면 한국의 주력 수출품목인 반도체 생산의 장래가 보장되지 않을까 한다. 자동차의 경우 중요부품 생산기술을 한국에 이전하고 생산된 제품을 일본, 아시아 국가들이 수입하며 중요부품 생산량을 한·일간에 조정한다. 일부 차종을 일본이 한국에 위탁 생산케 하고 일본이 완성차를 수입한다. 다음 단계에선 한·일 공동으로 설계하고 공동차종을 개발, 생산하는 전략적 제휴가 가능하다고 본다.

-4대 재벌의 부채비율 200%이하 축소조치가 무리라고 했는데.

▲연내에 200%내로 줄이라고 하니 기업이 연구개발·설계투자비 등을 대폭 삭감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일본 제조업체의 경우 부채비율이 220% 정도인 점도 감안하여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적절한 속도로 늦출 필요가 있다고 본다. 30대 재벌의 경우 부채비율을 200%로 줄이기 위해서는 1천600억 달러가 필요한데 한꺼번에 해치울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IMF의 요구가 한국의 특수성을 인정치 않은 무리한 측면도 있다고 본다.

-IMF의 요구 기준을 충실히 이행하다 보니 지금까지 매각된 기업들의 가격이 너무 싸다는 비판이 있는데.

▲매각가격이 국제시장의 관점에서 너무 싼 것이 사실이다. 미·일의 입장에서는'좋은 쇼핑거리(Good Shopping)'가 많다고 본다. 한국으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특히 미·EU의 해외투자는 기업육성보다 단기차익 투자가 많기 때문에 선별해야 한다.

-대만이 IMF위기에서 제외된 이유는 무엇인가.

▲세계 2위의 외환보유국으로 원천적으로 유동성 위기가 올 수 없었고 금융기관의 외환거래를 철저히 파악·대처해 왔다. 산업구조 면에서도 중소기업 중심으로 공업화가 이뤄졌고 다품종소량생산 체제에 기술축적을 해왔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서구식과 아시아적인 것의 차이인가.

▲일례로 노동시장의 경우 한국, 일본의 오랜 전통에 입각한 평생고용, 평생직장제도의 장점은 보호돼야 한다고 본다. 기술직 노동자의 경우 연공서열제·평생고용제는 능률·기술축척면에서 더 큰 장점을 발휘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최근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되 이런 장점을 살리자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에도 '한국적 한계'가 있다고 본다.

-지난 2년간 빈부차가 더 심해지고 중산층이 몰락하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데.▲빈곤인구(월 23만4천원의 1인당 생계비를 마련하지 못하는 인구)가 1천만명에 이른 것으로 안다.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은 평등지향성이 강하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계속 벌어지고 빈곤인구가 줄지 않으면 국가적으로 혼란에 빠질 위험이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빈부격차 해소를 위해서는 정부 재정이 생계비 보조 등 단순한 소득이전보다 취업의욕 유지(재교육 등)와 자녀교육보장 등에 우선 지원돼야 하고 세제 등에서 상조(相助)를 유도하는 정책이 채택돼야 할 것이다. 사장과 사원간의 소득대비를 보면 일본이 10대1, 미국이 160대1, 한국이 7대1이라는 통계가 있다. 미·일에서의 소득차가 큰데도 위화감이 적은 것은 차별의식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사회구성원들의 행동양식 차이 때문으로 보인다. 어떤 행동, 어떤 의식이 바탕이 되느냐에 따라 사회적 분열, 충돌의 인과로 작용한다는 점을 가진 층이 자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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