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삶의 시간

입력 1999-12-23 14:11:00

시어머님이 곧잘 들려주시던 옛날 얘기는 너무도 생생해서 바로 얼마전에 있었던 일처럼 여겨지곤 했다. 시어머님은 지금 85세이시다. 2년전만 해도 단정한 몸가짐에 기억력이 좋으셨고 치아도 건강하셔서 팔순잔치를 했을 때는 주위에서 칠순잔치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2년전부터 주위 사람들의 이름부터 하나씩 잊어버리시기 시작하더니 점점 심해져서 요즘은 가족들조차 알아보지 못하신다. 심지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하나 뿐인 손자한테까지 "누구세요?"하고 몰라보실 때는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초등학생인 아들녀석은 그런 할머니의 변해버린 모습이 믿기지 않는 듯 돌아서서 주먹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그리고 할머니와 같이 찍은 어릴적 사진을 갖고 와서 할머니 눈 앞에 보이면서 여기 있는 아이가 바로 자신이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그날 종일 비가 왔는데 그날 밤 아들녀석의 일기장에는 제목이 엉뚱하게 빗물이라고 씌어 있었고 대충 이런 내용의 글이 적혀있었다. '...비가 오는 날은 아마도 빗물들이 배가 고파 시간을 자꾸만 잡아먹나보다. 정말 금세인것 같다. 참 곱고 단정하신 할머니셨는데...'

나는 가끔 집안을 둘러보며 짐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 내게도 죽음이 다가올텐데 뒤에 남은 사람들이 내 짐을 치우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텅 빈 공간을 원하면서도 얼마지나지 않아 무엇이 그리도 구질구질 많아지는지.... 사람이 살아가는데 진정 이리도 많은 것이 필요할까.

20세기의 마지막 남은 몇 날을 보내며 한정된 시간 속의 나의 삶, 우리의 인생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과연 가치있는 일을 위해 나를 헌신할 수 있는지, 고통스러운 감정을 스스로 달랠 수 있는지, 고독 속에서도 홀로 있을 수 있는지, 창조성이 있는 사람인지....

유분순.한국무용치료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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