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칠순을 넘긴 할머니가 오십 평생 함께 산 할아버지를 상대로 "내일 죽더라도 나 오늘 이혼하고 싶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이 부부의 가정의 유지에 대해 법원은 "해로 하시라" "이혼하고, 위자료를 주라" "이혼은 안되며 끝날까지 함께 살아라"며 이혼불허·허가·불허라는 상반된 판결을 잇따라 내리고 있다.
이야기 둘.
한국의 친부모에게 버림받고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골수암을 앓는 바람에 조국의 핏줄을 찾은 성덕 바우만군. 양아들이 아니라 그냥 아들이라고 말하는 그의 미국인 양아버지와 차마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생모의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 널부러져 있다.
이야기 셋.
코흘리개 아들을 데리고 슈퍼에 나간 아버지. 요구르트에 이물질을 집어넣고, 아들에게 마시게 한 다음, 보험금을 노리고 신고를 했다. 또다른 아버지는 역시 돈에 눈이 멀어서 자식의 손가락을 잘랐다.
이야기 넷.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대형 아파트촌의 어느 집 거실에 걸린 사진틀에는 안정된 직장을 가진 40대의 남편과 적당히 살림때가 묻은 아내, 입시지옥에 시달리지만 웃고 있는 아들딸의 모습이 화사하다.
20세기를 불과 며칠 앞둔 한국 가족·가정의 스케치는 대체로 이렇다. 물론 컴퓨터에 결혼 사진을 올리고, 자녀를 몇명 둘 것인가에 합의한 사이버 부부 가족도 있고 한부모로 용감하게 세상을 이겨나가는 가족, 가사를 분담하는 평등가족, IMF로 공중분해된 가족도 있다.
가족의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음을 보여주는 갖가지 현상들이 불거지는 오늘날에 비추어 과연 21세기, 2000년대 미래 가족·가정의 모습은 어떨까.
2천년대를 이끌 주역들인 오늘날 대학생들이 생각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은 남녀학생간에 큰 차이를 보인다.
올해 경북대에 개설됐던 '여성학의 이해'(담당 정일선 경북도여성정책개발원 연구원)에 다뤄졌던 '가족관계의 변화와 미래가족'을 수강했던 약 100명의 대학생 가운데 남학생들은 비교적 미래 가족이 규범적이고 이상적인 틀에서 현재와는 큰 차이 없이 그대로 유지·존속되리라고 보았다. 반면 여학생들은 가부장제 붕괴의 가속화, 이상적인 결혼생활 실현을 위한 외국인과의 결혼, 남자보다 여자친구와 평생 살기 등으로 크게 변화된 가족, 가정상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드러내 성(性)별 미래 가족관의 큰 차이를 보였다.
지금까지 그러하듯이 여성의 희생이라는 기반위에서 유지돼왔던 가족이 온전히 유지되리라고 추정하기 어려운 상상의 단초를 제공하는 면이다. 여기에다 천박한 현대 문명은 유난히 강한 가족애로 다져진 한국 가정을 여지없이 흔들고 부수었다. IMF로 가족해체현상이 급증했나하면, 비디오방·PC방·노래방·운동경기장·술집…까지 출렁이는 유혹의 바다를 헤엄쳐서 가족구성원들이 가정에 도달해야하고, 집에 돌아와도 아무도 가정을 지키는 이가 없어서 썰렁하게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혼은 해마다 늘어서 70년대에는 20쌍 중 1쌍이 이혼했고, 92년에는 7쌍중 1쌍, 98년에는 3쌍중 1쌍이 이혼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시에서 살면서도 명절이면 필사적으로 귀향길에 오르고, 타국에서 눈감으면 뼈라도 고향땅에 묻히기를 소원한다. 평생을 떠돌던 탕아도 내세엔 부모를 찾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이 많아 한국의 가족이 그리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주)대교를 창업, 마흔이 안된 나이에 대표이사로서 탄탄대로를 걷던 강학중(42)씨는 모든 직위와 부를 버리고 홀연히 가정으로 돌아가 화제를 던졌다. 자발적 실업자 생활을 거쳐서 2년만에 한국가정경영연구소를 차린 그의 변은 "더 늦기 전에 가족이 됩시다". 아빠와 밥 같이 먹는게 소원이던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가정으로 돌아온 강학중 소장 뿐만 아니라 대구 칠곡에 있는 영남제이교회 조승희목사도 가정사역연구소를 운영하고 있고, 두란노서원의 박보경씨는 일과 사회에 빼앗긴 아버지들을 가정으로 되돌리기 위한 아버지학교를 큰 호응속에 운영하고 있다. 벌써부터 천주교대구대교구는 부부에게 결혼생활의 의미를 다시 깨우치는 ME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대구청소년상담실은 부모-자녀교육을 시리즈로 열면서 가정지키기, 가정의 소중함 일깨우기의 첨병으로 나서고 있다.
과연 가족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미래의 충격'에서 엘빈 토플러는 가정이 한번 심하게 파괴된 뒤에 현재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로 재등장 할 것이라고 예고한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사회학자 조은 동국대교수는 "가족원보다는 네트워크에 의존한 인간관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정보화시대에는 세대가 다른 부모와 자녀는 각각 자신의 행동원칙과 시간대를 가짐으로써 가족의 개인화가 더욱 심화되고 부부끼리도 개인화된 네트워크를 늘려갈 것"이라며 네트워크 가족의 등장을 점쳤다.
"부모의 결혼생활을 행복하다고 보는 청소년은 불과 10%도 되지 않는다"는 대구시청소년상담실 진혜전부장은 "미래사회에서도 가족을 유지시켜나가기 위해서는 기성세대들부터 가정을 이기적이고 출세만 따지는 곳으로 왜곡시키지 말고 따뜻함과 신뢰가 넘치는 곳으로 만들기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과 연소자의 희생과 억압위에 유지됐던 가족질서는 긴장과 해체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는 이효재 전 이화여대교수는 자율적이며 평등한 진정한 인간가족의 실현만이 21세기 미래가족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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