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에 서서-이문열(소설가)

입력 1999-12-20 15:12:00

우리 정신의 유년은 저들 서구(西歐)의 지성이 다채롭게 펼쳐 보인 지난 세기말의 노을에 취하면서 시작되었다.

포와 보들레르와 오스카 와일드의 퇴폐적 유미주의에 젖어 아슴아슴 잠들다가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에 가슴 섬뜩해 깨어나 우리의 세기로 들어섰다. 그리고 아직 우리의 세기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벌써 작별을 고해야 할 때가 왔다.

20세기는 참으로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광기의 시대, 불확실성의 시대, 분열의 시대, 창조의 시대, 부정과 해체의 시대…어쩌면 이 세기는 로마제국이 망한 이유보다 더 많은 이름을 가질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시간의 단위로는 다같이 100년이지만 자연과학의 발달에 따른 유동성(流動性) 혹은 유동속도가 이 세기로 하여금 그같이 다양한 자기연출을 가능하게 한 탓으로 보인다.

틀림없이 우리는 이 한 세기 동안 수많은 광기와 미움의 영웅들을 받고 보냈으며, 이 세기에 폭발한 지식들은 오히려 그 이전 어느 세기보다 세계의 확실성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한편으로는 전에 없이 많은 새로운 것들을 물질과 정신세계로 끌어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면 가장 특징적인 것은 부정과 해체인 듯 싶다. 그 이전 수 천년 인류가 구축한 문화적 중심 치고 온전하게 보전된 것은 없고 믿어온 권위 치고 해체를 경험하지 않은 것도 없다.

종교는 더 이상 성(聖)의 중심적 위치를 지켜내지 못하고, 미학(美學)의 고전적 원리들은 부정되었으며, 잔인한 이데아의 세계는 여지없이 해체되었다. 지난날 의심없이 받아들였던 선(善)의 원리도 제 모습대로 살아남은 것은 없다.

이성과 합리를 바탕으로 추출되어 이 세기 전반(前半)만 해도 그토록 우리를 감복시켰던 지적(知的) 권위들도 성한 것은 별로 없다. 칸트와 헤겔에서 프로이트며 소쉬르에 이르기까지 한번씩은 부정과 해체를 경험했고, 마침내는 전 세기의 거대한 부정과 해체 위에서 성립된 마르크시즘까지도 성공적으로 지워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결과만으로 이 세기의 이름을 부정과 해체로 하고 싶지는 않다. 탈(脫)중심이 있으면 다원화(多元化)가 모색되었고 권위의 해체도 대안(代案)이 전제된 것이었다. 물질의 세계에서도 정말로 많은 새로운 것들이 무(無)에서 불려나왔다.

원자력이나 플라스틱, 그리고 여러 치명적인 화학물질처럼 재앙의 측면을 함께 하는 것이니, 컴퓨터처럼 아직은 그 발전의 끝이 가늠되지 않지만 낙관할 수 밖에 없는 이 세기의 고안들 모두가 우리의 끊임없는 모색의 산물이었다.

이 세기가 끝난다고 해서 바로 시간이 멈추고 인류의 역사가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이 세기의 이름은 그 영속성 위에서 구해져야 한다. 함께 보낸 우리에게는 혼란스럽고 불안하기 그지없는 부정과 해체의 시대였으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그 뒤에 있는 탐구와 모색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세기의 이름은 탐구와 모색의 시대가 되어야 하며, 우리는 서둘러 이 세기와 작별할 것이 아니라 그 경험과 성취를 바탕으로 새로운 세기를 맞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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