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당직 불구 정국중심 '소외'

입력 1999-12-17 14:22:00

97년 대선을 통해 이뤄진 50년만의 정권교체는 여권 일색이었던 대구·경북 정치권에 일대 혼돈과 변화를 몰고 왔다.

여권 울타리속에 안주해 왔던 지역 정치인들은 바람막이 없는 야당생활에 적응치 못하고 곧바로 여당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여야가 뒤바뀐 정치현실에도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무기력증을 노출하기도 했다.

대선에서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면서 세번째 '킹메이커'역할을 자임했던 한나라당의 김윤환 전부총재의 위상은 TK정치권의 부침을 잘 드러내고 있다. 킹메이커에 실패한 김 전부총재는 대선 직후 치러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이회창 총재 체제 출범의 견인차 역할까지 맡았으나 처우와 지분을 문제삼아 이총재와 불협화음을 빚다가 결국 비주류의 길로 내달렸다.

이후 김 전부총재는 DJ정권의 대표적 '사정 대상'으로까지 몰리는 곤욕을 치러야 했고 그의 정치적 영향력 퇴조는 지역 정치권을 구심점없이 방황하게 만든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허주(김 전부총재)는 끝났다'는 일부의 평가속에서도 그는 16대총선을 앞두고 대여투쟁 의지를 강하게 곧추세우면서 이 총재와의 화해를 선언하고 지역에서의 영향력 회복에 부심하고 있다.

김 전부총재가 정권교체의 결과와 그에 따른 풍파를 받아들였다면 일부 중진의원들은 여당에서 야당으로 바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양지를 선택했다.

새 정부 출범 직후인 98년 4월 김종필 총리 인준안을 둘러싸고 여야가 격돌하자 박세직 의원이 가장 먼저 여당으로 옭겨갔다. 박 의원은 "대화합과 대타협의 큰 정치를 이룩하는데 초석이 되겠다"며 공동여당인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겼고 곧이어 5월에는 '88 올림픽조직위원장' 경력을 바탕으로 '2002년 월드컵조직위원장'직을 맡아 '잿밥'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눈총을 받았다.

이어 지역정치권의 중진(3선)인 권정달·장영철 의원이 여권의 동진(東進)정책에 호응해 국민회의에 전격 입당, 지역 정치권에 적지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이들의 당적 변경에는 이회창 총재와의 소원함도 원인이 됐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은 거침없는 지역정서의 역풍 속에서 유권자들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야에서 여로의 당적이동은 15대 국회 초반에도 적지 않았다. 15대 총선 당시 '반YS'바람이 대구에서는 녹색(자민련)돌풍이었지만 경북에서는 무소속돌풍으로 나타났다. 경북에서는 김일윤·임진출·박시균·권정달 의원과 옥중당선된 허화평 전의원 등 무소속후보가 5명이나 당선됐다. 이들 가운데 허 전의원은 5·18특별법 제정의 결과, 12·12사건과 관련돼 의원직을 상실했고 나머지 4명은 모두 '지역발전' 등의 명분으로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재경위원장을 맡고 있던 황병태 전의원은 한보비리와 관련,구속돼 결국 의원직을 상실했다. 황전의원은 최근 사면·복권돼 재기를 노리고 있고 김화남 전의원은 당선 직후 자민련을 탈당했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었다.

15대 국회 중반 이후에는 자민련 박태준 총재의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경남 양산출신인 박 총재는 지난 97년 '포항북'보궐선거를 통해 무소속으로 TK정치권에 입성했다. 97년 대선과정에서는 자민련의 총재가 되면서 DJT연대의 한 축을 형성,DJ정권 초기 경제정책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공동여당의 총재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지역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지금은 16대 총선을 앞두고 '중선거구제'에 사활을 걸기도 했던 박총재는 2여합당 반대의 중심 축에 서 있다. 지역 중진의원들은 여야를 오가면서 원내총무와 정책위의장 등 주요당직을 맡기도 했으나 정국을 주도하지는 못했다.

권정달 의원은 국민회의 부총재를 맡고 있고 장영철 의원도 잠시 국민회의의 정책위의장을 맡았다가 예결위원장으로 수평 이동했다. 장의원은 지난 97년에도 신한국당 소속으로 예결위원장을 지낸 바 있다.

지난 해 보선을 통해 4선 고지에 오른 한나라당 정창화 의원은 당내 비주류 대열에 서 있다가 뒤늦게 대구·경북 몫의 정책위의장을 맡아 선거구문제 등 여야 정치협상의 창구역할을 하면서 이회창총재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한나라당 이상득 의원은 이례적으로 여당 정책위의장을 맡았다가 야당이 된 이후에도 정책위의장 직을 수행하는 등 당내 제1의 경제통으로 자리잡았고 '당직 복'도 많았다. 이의원은 그러나 대선 직후부터 약 4개월간 원내총무직을 수행했으나 대여 강경투쟁 분위기에 밀려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3선의 김일윤·김찬우 의원도 중진급에 속하지만 15대국회 후반기 건설교통위원장과 보건복지위원장을 맡는 경력 이외에는 두드러진 활동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편 의정활동에서는 적극적이었던 한나라당의 초·재선의원 대다수는 여당체질을 재빨리 바꾸지 못해 진정한 야당의원의 면모를 보이는데는 미흡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구 민주당출신인 한나라당 권오을의원은 의정활동에서 적잖은 성과를 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해는 각 부처에 숨겨진 국가정보원예산의 규모를 폭로한데 이어 지난해에는 1조4천억원의 불용 예산을 삭감하는 성과를 올려 시민단체로부터 제1회 '납세자의 친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박헌기 의원은 장수 경북도지부위원장 직을 무난히 수행했고 옷 로비 청문회 때는 특위위원으로 나서기도 하는 등 묵묵히 제몫을 다했다는 평가다.

황병태 전 의원의 뒤를 이어 보선을 통해 당선된 한나라당 신영국 의원은 대여투쟁의 선봉에서 강경론을 주도하는 등 투쟁성을 발휘했으나 정치개혁특위 간사로 '불공정 선거보도에 대한 언론인제재'에 합의해 주는 등 다소 신중치 못하다는 지적도 받는다.

서울시장과 총무처장관을 지낸 이상배 의원은 장관직 경력을 인정받아 당무위원을 맡고 있지만 정치적인 역할보다는 지역구다지기에 더 신경을 쏟고 있다. 임인배 의원은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반이회창파였으나 대선 이후 이 총재의 특보가 됐고 건교위로 상임위를 옮긴 이후 의정활동에서도 탄력이 붙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광원 의원은 한나라당 사무부총장직을 수행하면서 여러차례의 재·보선을 승리로 이끄는 등 조직관리에 수완을 보였다는 평이다. 한나라당 청년위원장을 맡고있는 주진우 의원은 이 총재의 전위부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나 기업인 출신인 탓에 야당 의원으로 변신하는데는 다소 더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민련의 김종학 의원은 정계입문 초기부터 JP와의 인연 등으로 지금껏 자민련 당적을 지키며 고군분투해 왔으나 대구인근이라는 지역구의 정서상 역풍을 우려, 최근 무소속출마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고 한다.

徐明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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