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20C 향토를 빛낸 체육인-이만수

입력 1999-12-16 14:40:00

이만수(41). '투박한 몸짓과 어눌한 말투' '홈런하면 떠오르는 얼굴' '프로야구하면 생각나는 얼굴', 그는 스타였다. 대구팬들의 성원은 아직도 '절대적'이다.

그의 '우직함'은 팬들에게 매력을 발산했고 홈런을 친 뒤 어린아이처럼 펄쩍펄쩍 뛰며 좋아하는 모습은 남녀노소에게 웃음과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경기장 분위기를 휘어잡는 입심도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괴력의 사나이 '헐크' '떠벌이'로 통하는 이만수의 선수생활은 화려했다. 그는 대구상고시절 5차례나 전국대회 정상에 올랐고 77년 청룡기대회에서는 최우수선수, 타격 타점 최다안타상 등 개인상을 독점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스타성은 프로에 들어가면서 더욱 빛을 발했다.

프로야구 제1호 홈런, 첫 안타, 첫 득점의 주인공으로 프로야구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83년 공수에 걸친 눈부신 활약으로 최우수선수(MVP)에 뽑혔고 이듬해인 84년에는 타율(0.340), 타점(80점), 홈런(23개) 부문을 석권, 3관왕에 올랐다. 83년부터 내리 3년간 홈런왕에 올랐고 83년부터 5년연속 포수부문 골든글러브수상기록과 11년 연속 올스타의 주인공으로, '기록의 사나이' 그 자체였다.

올 시즌 장종훈에 의해 통산 최다홈런 기록(252개)이 깨지기는 했지만 86년 첫 100호 홈런, 91년 첫 200호 홈런의 주인공이 되면서 팬들에게는 가장 먼저 생각나는 홈런타자로 각인돼 있다. 그는 천재성보다 노력으로 양지의 야구인생을 펼친 진정한 프로였다. 화려한 성적 이면에 경기가 끝나면 새벽 2시까지 다른 팀 타자들의 특징을 메모하고 하루 1천번 이상 배팅훈련을 하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다.40세까지는 그라운드를 누비겠다던 그도 세월의 무게는 떨치지 못했다. 97년, 39세를 끝으로 현역에서 자의반 타의반 은퇴한 그는 미국에서 지도자로서의 새 인생을 개척하고 있다.

이 달 초 동양인 최초로 미국 메이저리그 정식코치에 오른 그는 투수들의 구위를 점검하는 불펜코치지만 팬들을 이만수향수에 젖게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