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상처 혹은 흔적을 묻으며

입력 1999-12-15 14:25:00

이제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 한 세기가 저물어 가고 있다. 끝머리에만 이르면 늘 불쑥 나타나 발꿈치를 잡는 것은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허망한 바람이다. 아마도 후회라는 물건은 앞서는 법이 없어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자체가 마음의 평정을 잃은 것이기에 고통스러울 것이고, 상대에게서 입은 상처가 아려서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도 미워하는 것 쯤은 아닐지라도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미움을 받을만한 짓을 한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 때문에 고통스러울 것이고, 그 일은 자신의 기억 속에도 생채기로 남아 있을 것이기에 고통스러울 것이다. 제 잘못 때문에 겪는 고통이야 그래도 덜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겪어야 하는 억울함은 더욱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억울한 일은 그치지 않고, 후회할 짓은 날마다 반복된다. 그것은 아마도 탐냄이 지나친 때문일 것이다.

탐내는 마음만 없애면 상처를 만드는 일쯤은 없어질 법도 한데 또다른 번뇌와 미움은 끊임없이 잉태되고 자라나서 사람이란 참으로 어리석은 존재인 것 같다. 그러기에 인간을 만든 것은 하느님의 실수였다고 하는 말까지 생기게 되었는가 보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그 속에서 온갖 거짓과 위선이 난무한다. 그렇게 해서 번화(繁華)를 얻은들 그게 뭐 그리 대단할까? 단 한번이라도 끝없는 직선의 주로(走路)에서 훌쩍 벗어나 솔밭 사이로 떨어지는 폭포를 바라보며 줄 없는 거문고를 어루만지고 싶다는 얼토당토 않은 사치를 꿈꾸어 본다. 번화는 한 때의 꾸밈일 뿐이요, 고적(孤寂)이 본디의 바탕이라고 했던가? 욕심과 미움을 가라앉히고 동요없는 마음의 본디 바탕을 보고 싶다.

옛 사람들은 탐냄이 없는 마음을 보배로 삼았다. 탐내는 마음 앞에서는 지극히 높은 기상도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지조도 힘을 쓰지 못하고, 사랑도 미움으로 변한다. 남에게 준 상처, 남에게 받은 상처도 이제 기억 속에 흔적쯤으로 묻어두고, 새로운 세기에는 아름다운 마음과 마음이 서로 만나 열어가는 사람 향기 나는 세상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김성범.정동서당 훈장.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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