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희(가명.44.대구시 달서구 월성동)씨는 오늘도 종일 누워지냈다.
5년전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두통이 심해 매달 정기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병원 문턱을 못 밟은 지 벌써 1년째. "아파도 참을 수밖에요. 고통보단 허기가 더 앞서니까. 지금 먹는 쌀과 김치도 이웃집과 사회복지관에서 줬어요"
15년전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세 딸마저 남겨둔 채 가출, 서울에서 식당일을 하며 악착같이 모은 적잖은 돈은 객지에서 얻은 자궁경부암과 척추결핵을 치료하느라 모조리 날려버렸다. 모진 이력과 병력을 거치는 동안 한창 나이의 정씨에게 남은 건 의지할 데 없는 병든 육신 하나.
일당 2만원을 받는 취로사업 일거리조차 두달전 끊긴 그에겐 '제대로 검사나 한번 받아보고 싶다'는 실낱 같은 기대가 오히려 사치일 뿐이다.
중병은 가난한 자에게만 찾아드는가. '빵'문제를 겨우 해결한 빈곤층 중 상당수는 질병이라는 또다른 시련에 신음하고 있다.
현재 대구지역 의료보호대상자는 5만1천여명. 외래진료, 입원비, 투약비 등을 합쳐 올들어 지난달까지 이들에게 든 의료보호비용만 416억여원. 올해 생보자가 크게 늘면서 지난해보다 100억원이나 늘어났다.
종합병원 입원환자의 5~10%, 대구의료원의 경우 40%가 의료보호 환자일 정도로 병원마다 영세민 환자가 넘쳐난다. 그러나 의료보호를 받더라도 난치병을 앓거나 심각한 신체손상을 입은 빈곤층 환자중 상당수는 치료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
김형철(33) 사회복지사(월성사회복지관)는"고가이면서도 중증질환에 필수적인 MRI(자기공명영상), 초음파 촬영 등이 의료보호 혜택에서 제외돼 있다보니 환자들이 돈을 겁내 치료를 중도포기하는 경우가 잦다"며"복지관이 나서서 치료비를 못낸 환자의 병원비를 깎아준 일까지 있다"고 밝힌다.
의료보호대상자가 아닌 일반 저소득층의 경우 문제는 더 심각하다. 돈이 없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병을 키우는 사례도 흔하다.
트럭행상 장모(40.대구시 북구 검단동)씨는 결핵에 걸려 몸무게가 15kg나 빠졌지만 병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계속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지만 생계유지에도 빠듯한 하루 2, 3만원 벌이에다 의료보험료를 3년이나 못낸 처지에 병원행은 한낱 바람일 뿐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종합병원들은 1명 이상의 사회사업사(사회복지전문요원)를 의무고용해 환자 갱생.재활사업을 맡기도록 돼있는 법규마저 외면하고 있다. 대구지역 종합병원 13개중 사회사업사를 고용한 곳은 대학병원 4, 5곳에 불과하다.
사회사업사는 소아암, 백혈병, 심장병 등을 앓는 영세민 환자를 위해 후원자 결연과 치료비 확보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 엄청난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한때 치료를 포기했던 재생불량성 빈혈환자 박모(26.여)씨는 모병원 사회사업사의 힘을 빌려 골수이식을 받고 지속적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케이스.하지만 이같은 혜택이 모두에게 주어질 순 없다.
한 대학병원 사회사업사는"빈곤층 환자 대다수가 병원에 사회사업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안다 하더라도 워낙 도움을 청하는 환자가 많아 실제 후원을 받기는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운이 좋아 제때 도움을 잘 받으면 살고, 안 그러면…" 굶주림에 병마의 고통까지 덮친 빈곤층 환자들. 2000년대를 앞둔 지금, 이들 앞엔 한숨과 암담함만이 기다리고 있다.
金辰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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