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여명이 다가온다-(5)포항

입력 1999-12-06 14:00:00

포항시는 최근 시승격 50주년에 즈음한 시민의식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서 포항시민의 의식과 기질상의 특징으로 '보수적이고 배타적'(33%)이라는 항목이 눈길을 끌고 있다. 반면 포항시민으로서의 자긍심에 대해서는 3명중 2명이 '보통 또는 그 이하'라고 응답했다.

단적으로 포항시민들은 자신에 대한 긍지는 낮으면서도 상대방을 포용하려는 의지는 부족한 '결집력 부족'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포항이 보유한 잠재적 발전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민심을 한데로 모으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를 위한 선결과제는 '포항과 포철의 이분론(二分論)'부터 치유해야 한다는 데로 모아진다.

지금껏 포항시민들은 굵직한 사안은 대부분 포철과 결부시켜 생각해왔다. 환경, 교통, 주택, 심지어 소비시장의 경기악화 원인도 포철에 있다고 할 정도였다. 현안이 불거질 때마다 "원인제공을 너희들이 했으니 해결책도 너희들이 제시하라"는 식의 요구가 연중 몇차례씩 쏟아지고, 이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시민 감정은 '반(反)포철'로 돌아서는 악순환이 30년 이상 계속되면서 '미운 정'이 더욱 깊어져온 게 사실이다.

물론 그동안 양측간 앙금해소를 위한 노력도 많았다. 포철은 '지역협력'이란 이름으로 매년 수억원에서 수백억원을 지역사회에 내놓았다. 수해등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직원들을 내보내 고통을 나누었고, 지역내 90개 마을·단체와 자매결연을 맺어 직원·주민간 인간적인 교류 기회를 확대해 왔다. 포항시나 시민들 역시 각종 행사때마다 포철측을 초청, 예우하고 친근감을 표시하기도 했으나 깊숙이 팬 감정의 골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면 포항과 포철의 분리론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공기업으로 출발한 포철은 설립이후 지금까지 포항에서 단순한 기업체의 의미를 넘어 중요한 정부기관으로 대접받아 왔다. 역할 역시 비슷했다. 포철은 본·계열사 및 연관단지 협력·하청·수요업체들과 함께 지역 경제력의 70% 이상을 떠맡아 온 탓에 모든 이권의 발생지였고, 또 포철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지 않고는 이른바 유지축에도 끼지 못하는 '영향력'의 집합지였다. 당연히 중소기업들은 포철에 대한 온갖 정보에 목말라 했고 이런 정보에 근접해 있는 각종 기관들이 호황(?)을 누리면서 권경(權經)유착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자고나면 각종 소문이 꼬리를 무는 '촌동네 스타일'이라는 포항시민들의 자조섞인 자기평가는 되씹어봐야할 대목이다.

권력과 금력이 합쳐진 포철. 처음부터 포항과 포철은 대등한 관계에 설 수가 없었다. 이것이 이분론의 출발점. 과거 관선시장이 포철 회장을 만나기 위해 본사 비서실에서 몇시간씩 기다렸다는 이야기는 이같은 관계를 대변하는 일화다.

일반 시민들의 자존심은 서서히 뭉개졌고 포철에 대한 반감도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부와 영향력을 쌓기 위해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포철의 자만, 포철이 발주한 협력·하청·용역·납품 등으로 경제적 부를 축적한 인사들에 대한 일반시민의 상대적 박탈감, 포철을 등에 업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기관들에 대한 또다른 형식의 반감 등이 어우러져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진 것이다.

부산 출신으로 포항에서 생활한지 18년째인 경제인 강모(50)씨는 이런 점을 지적하며 "포철·반포철의 문제는 포철이라는 기업이 들어섰기 때문이 아니라 포철 주변의 사람들 때문"이라고 했다.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박모(51)씨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

포철에서 오래 근무했던 이모(58)씨 역시 "포철과 직간접으로 연결돼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포철편에 선 사람과 반대편에 서 포철을 맹공하는 두 부류였다"고 했다. 이씨는 이어 "포철을 지지한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을 만들어 냈고, 반대편은 없는 감정까지 억지로 조장해 포철을 압박해 뭔가를 얻어내려 했다"며 "이들로 인해 포항과 포철의 사이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포철, 반포철'을 만들어 내는데는 정치권 인사들도 한몫을 톡톡히 했다. 포철은 공기업의 특성상 정치권력에 약할 수밖에 없었고 이권이 있는 곳에는 정치인들의 영향력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협력작업을 따낸 ○○기업의 뒤에는 ○○의원이 있다"거나 "아무개씨는 아무개 장관이 뒤를 봐준다"는 이야기가 포철주변에선 끊임없이 나돌았고, 국회의원 선거나 대통령선거가 지나면 속칭 '백그라운드'나 '줄서기' 시비가 있었던 업체들중 일부가 협력·하청사에서 교체됨으로써 설(說)의 사실성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지금도 몇몇 기업인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업안보를 위해 정치권 줄대기에 안간힘이다. 묵묵히 이같은 상황을 지켜봐야 했던 일반 시민들이 '국민기업 포철'에 실망감과 함께 등을 돌린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특히 해거리로 있다시피한 선거는 포항을 포철과 반포철로 갈라놓는 결전장에 다름없었다. 포철 본계열사의 포항지역 근무직원 2만명에다 비슷한 성향인 협력사 직원까지 합치면 포철의 직접 영향력하에 있는 사람은 3만명에 달한다. 포철 모간부의 말처럼 '마음만 먹으면 국회의원 한명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시절'도 있었던게 사실이다. 따라서 선거철만 되면 '포철'과 '비포철'의 정서를 만들어 시민들을 갈라 세웠고, 미처 치유되기도 전에 다음 선거가 다가오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좁은 바닥에서 극소수 인사들이 자신의 뜻이 곧 전체시민의 의사를 대변하는듯한 모습을 보이고, 포철 역시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면서 오늘날의 양갈래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2000년. 포항과 포철에도 예전에 없던 지각변동이 시작된다. 최근 수년간 진행돼온 포철의 민영화가 이번 주로 완전 끝나게 된다. 이는 공기업 포철이 '포스코그룹'으로 재편되고 영리추구에 전력하는 사실상의 사기업으로의 변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포철의 지역협력은 민영화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틀로 바뀔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창 진행중인 영일만 신항과 대구~포항간 고속도로 공사, 테크노파크 조성이 끝나면 포항은 한반도의 동쪽끝 지방소도시에서 경계없는 전국도시로 탈바꿈하게 된다.

지난 98년 울산시가 '현대그룹'을 발판삼아 광역시로 성장했다. 공항과 항만, 고속도로가 뻗힌 사통팔달의 입지여건을 살려 더 큰 도시, 더 내실있는 도시로의 발전을 꾀할수 있는 출발점이 2000년이라며 포항시민 등이 새천년 시작에 거는 기대 또한 크다.

일반 시민들은 포철도 포항시의 한부분이고 중요 구성원이라는 실체를 인정하고 포용해야 하고, 포철은 지금까지 '포항'에 가졌던 사시적인 시각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발전과 성장이 기다리는 21세기 포항의 도약을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화합이 최우선 과제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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