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아, 영원한 신라인이시여

입력 1999-12-04 00:00:00

고청 윤경렬(古靑 尹京烈)선생이 푸르디 푸른 신라의 하늘 속으로 떠나셨다. 1999년 12월 3일 오전 10시, 경주 국립박물관 뜰에서 있은 영결식에는 알짜배기 조문객들이 선생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눈물로 지켜보았다. 경주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선생이셨다. 트레이드 마크인 성성한 백발에 흰두루마기를 걸치시고 길을 나서는 모습은 한마리 고고한 학이셨다.

나는 먼발치에서만 선생을 흠모했었다. 지난해 자서전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을 가슴에 품고 선생을 뵈러 간 적이 있다. 마침 선생은 계셨다. 경주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포항 방면으로 한 오분쯤 달리면 왼쪽에 국립경주박물관이, 오른쪽에 남천을 끼고 양지마을이 수줍은듯 숨어 있다. 남산을 비껴보며 양지마을 중심에 고청 윤경렬선생이 기거하는 고청사(古靑舍)가 있다. 그날 선생은 개다리 소반 위에 놓인 목이 긴 상감청자 술병에 술을 손수 따루어 주셨다. 목이 확 타는 듯한 배갈이었다. 팔순의 연세에도 배갈을 즐긴다고 하셨다. 몸통이 동그란데다 목이 가늘게 빠져 살짝 휘어진 청자 술병에는 꼴꼴꼴 소리가 났다. 흡사 이른 봄날의 꾀꼬리 소리같이 경쾌했다. 선생은 우리의 멋을 고스란히 몸으로 즐기시며 사시는 분이시구나 절로 감탄이 나왔다. 나는 황감하게도 술 몇잔을 더 받아마셨다.

윤경렬 선생은 어떤 분이셨던가. 함경북도 주을에서 나셨고, 개성을 거쳐 삼십대 중반에 경주로 오셨다. '나는 일본에 가고 올때 경주 부근을 지나면서도 막상 들르지 못했다. 내가 일본으로 인형수업을 떠날때가 10월이었는데 추석 지나면 눈이 하얗게 덮이는 주을과는 달리 경주 들판은 누렇게 벼가 바람에 출렁대고 있었다. 경주는 내게 있어 비상금 같은 것이었기에 때문에 당시에는 그냥 지나치고 만 것이었다. 이제 고향으로 갈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비상금을 써버리는 듯한 심정으로 경주에 도착했다' 자서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비상금이란 어떤 것인가. 자기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선생은 그 비상금을 다 털어서 경주를, 아니 신라를 사랑했다. 경주에 안착한 뒤 우리의 얼굴과 풍속 인형으로 호구를 지탱하면서 경주 어린이박물관학교를 열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처음의 일이다. 이 일은 선생이 이승을 다하실 때까지 지키셨다. 그리고 틈만 나면 남산을 오르내리셨다. 육백번이라고 했던가. 남산 골짝골짝 역사에서 비켜난 유물과 유적을 찾아 내어 비밀을 풀어내시려 했다.

한때 나는 선생을 '고구려 사람이 경주에 내려와 신라 사람 행세를 하고 있구나'하는 불경스런 마음을 품은 적이 있었다. 이 얼마나 치졸한 생각이었던가. 실로 선생께 부끄러울 따름이다. 나의 가계를 보면 시조왕 혁거세로부터 64세손이니 내 핏속에는 얼마간의 신라의 하늘이 숨쉬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경주에서 북으로 40리 떨어진, 향가 '모죽지랑가'의 고향인 주사산을 바라보며 나는 어린날을 보냈다. 거기다 중학교 3년을 경주에서 다녔지만 여태까지 남산을 열 번도 채 오르지 못한 얼치기 신라인이다.그러다 지난해 '향가의 고향을 찾아서'란 연재를 하면서 삼국유사 속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 보았을 뿐이다. 이러고도 내가 신라인임을 자처하고 있다니 실로 통탄스러울 뿐이다.

이제 이십일세기를 한 달도 채 남겨 두지 않았다. 연일 터져나오는 위정자들의 위선과 구린내를 맡으며 세기말의 조국의 현실은 암울하기만 하다. 왜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야만 하는가. 그래 새로운 세기엔 희망을 갖자. 우리 모두 정직하게 다시 태어나자. 윤경렬 선생은 신라의 백결같은 이 땅의 스승이셨다. 선생으로 하여 경주는 얼마나 행복하였던가. 나로 하여금 내 주위가 행복해 질 수 있기를. 이 땅이 살아 볼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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