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반공 권효이(52.대구시 달서구 상인동)씨의 오토바이는 항상 바쁘다. 다리가 불편한 이들에게는 전용 "싸이카"로,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말만 해도 움직이는 교통수단'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권씨를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가끔 그가 선반공을 그만둔 것으로 착각한다. 대구시 지체장애인협회 자원봉사자로 10년 가까이 활동해 온 그가 일을 하다가도 장애인들이 부르면 일을 제쳐두고 달려가기 때문.
대구지역 장애인들의 여름캠프가 열렸던 지난 여름, 권씨는 철공소일을 제쳐두고 해변에서 이틀동안 땀을 흘렸다. 장애인들이 편히 다닐 수 있게 길을 닦고 이용하기 쉽게 화장실도 만들었다. 자원봉사자 동료들은 권씨가 없으면 장애인들의 캠프는 꿈도 못꾼다고 입을 모으기도 했다.
권씨가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세때다. 강원도 동해에서 살 때 옆 방에 머물던 폐결핵 환자를 매일 데리고 나가 산보를 시키면서 성치 못한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에 대한 권씨의 사랑이 깊은 가장 큰 이유는 권씨 자신이 장애인이기 때문. 6.25가 터졌던 50년 7월, 어머니의 품에 안겨 피난을 내려오다 폭격을 맞아 온몸에 화상을 입었고 결국 등이 굽어져 버렸던 것.
하루 종일 쇠를 갈아 힘들게 버는 돈이지만 권씨는 봉급조차 장애인들을 돕는데 쓰고 있다. 대구시 서구 비산동에 사는 김모(46)씨는 부산의 고무공장에 다니다 원인 모를 질병에 걸리는 바람에 눈이 멀어 고통속에 살고 있으나 권씨가 지난 96년부터 매달 30만원씩 아무런 대가 없이 건네주자 삶에 용기를 가지게 됐다.
권씨는 아직 열두평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며 '벌어온 돈을 다 가져와도 모자랄 판에…'라며 하소연하는 부인과 부부싸움을 벌인 적도 있으나 지금은 묵묵히 지켜보는 부인이 고맙기만 하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따라다닌 '장애인'이라는 굴레. 하지만 그는 자신보다 못한 장애인들을 도우면서부터 '장애'는 더이상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못사는 주제에 무슨 자원봉사냐고 남에게 손가락질 당할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지나간 오십 평생에 후회는 없습니다" 권씨는 대구시 지체장애인협회가 주는 '올해의 자원봉사자상' 수상자로 결정돼 이 달말 상을 받는다.
崔敬喆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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