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세상읽기-노랑머리 그리고 귀고리

입력 1999-11-23 14:30:00

보수적인 인식을 가졌다해서 수치심을 갖거나 창피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컴퓨터가 가진 복잡하고 다양한 기능이나 그것이 제공하는 정보를 세련되게 다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애써 감추려 하거나, 독수리타법으로 가까스로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계면쩍음을 갖고 있기도 하다. 급속도로 변하고 있는 신세대들의 가치관이나 생활패턴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도 창피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기성세대들도 있다. 그래서 자신은 어쩔 수 없이 뒷자리로 밀려난 구닥다리이고, 폭발적이며 가공스런 문화적 변혁에서 뒤떨어진 낙오자일 수밖에 없다는 비관에 이르는 기성세대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를 비감에 젖게 만드는 위험한 발상이란 것을 모른다. 기성세대는 나름대로 그 시대의 정제된 문화적 체험 속에서 살아왔다는 자긍심이 있다는 것도 어느덧 망각해버린다.

이러한 것을 위험한 발상이라고 말한 것은, 그것에서 비롯된 수치심이나 자긍심의 일탈이나 낙오자로 단정해버리는 것은 자칫 신세대의 풍속에 대한 상대적 적대심으로 변질될 우려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으로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풍속 하나하나가 모두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거북하고, 못마땅하고, 두렵기까지 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돌연변이로 예단해 버리기 때문에 배신감이나 적대심은 자연스럽게 자리잡아 버릴 수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는 머릿결을 노랗거나 빨갛게 물들이는 것이 전혀 이상하게 보일 것도 없고, 심지어 남자가 귀고리까지 달고 다니는 것에도 전혀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기성세대의 시선으로 보기엔 그런 돌출적인 패션감각은 시쳇말로 두뇌가 텅텅 비어있는 아이들의 요란스럽고 저급한 도깨비놀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멀쩡한 바지에 생다지로 구멍을 내어 허벅지가 드러나도록 마름질해서 입고 다니는 옷매무새 역시 참하게 보일리 없다.

그런데 그러한 젊은이들 모습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우리들 기성세대가 오늘의 젊은이들이 갖는 시간 속에 살게 되었다고 가정을 해보았을 때, 과연 우리는 그러한 패션감각을 단호히 외면하고 살 수 있을지 자문해 보면 해답은 명백해진다. 수업을 마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와야 할 아이의 발길이 연예인들의 출입이 잦은 방송국으로 향하고 있다면, 우리들 기성세대는 일단 문제발생의 징조로 봄직하다. 그러나 그 아이에겐 부모들의 바람과 의지를 거역해야할 만큼 사생결단의 문제와 버금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들 기성세대들이 공부하고 있었을 때의 우상은, 정치가나 판검사나 행정가였다면 오늘의 신세대의 우상은 연예인이나 하찮게 여겼던 전문직이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에 이런 세대간의 간극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한 지붕밑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세대간의 대화는 단절되고 설혹 대화가 있다해도 부모와 자식간의 치부만 헐뜯는 험악한 입씨름만 오갈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기성세대는 그들이 살아온 시대의 중심축에서 혹은 정점에서, 향유했거나 향유할 수밖에 없었던 문화적 체험을 가졌다. 체험의 제한성이나 열악성은 개인적인 의지를 벗어났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한 제한성은 오늘의 젊은이들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젊은이들이 향유하는 문화를 저급하거나 천박하게 보고 있는 한 심정적 괴리감을 극복하기란 손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겪었던 문화적 체험과 소유를 소중하게 여기고 자긍심을 가질 때 이해라는 문은 개방되고 세대간의 적대심도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믿는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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