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아빠는 곰팡이야

입력 1999-11-20 00:00:00

우리 집에 네살배기 아기가 있다. 요즘 한창 말을 배운답시고 하도 떠들어대는 통에 옆에 있으면 귀가 얼얼할 지경이다. 아빠, 바람이 불어, 방에 개미가 다녀, 밥에 연기가 나, 주차장에 빨간차가 두대야, 녀석의 입은 쉴 틈이 없다.

◈아기는 언어의 조립공 같아

아기가 끊임없이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혀가 움직이는대로 무작정 조잘대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함부로 조잘대는 아기의 말에 어법상 틀린곳이 하나도 없다. 구름이 날아간다. 나무가 날아간다. 불자동차가 날아간다…의미는 통하지 않으나 문법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는 것이다. 명사형 주어가 들어갈 자리에는 꼭 명사형을 집어넣고 부사어가 필요한 자리에 형용사나 동사를 넣지 않는다. 이를테면 '아빠 (벌레)먹어'라고는 해도 '아빠(좋아)먹어'하는 법은 없는 것이다. 참 신통한 일이다.

언어학자들은 아기가 말을 배울때 단어를 익히지 않고 먼저 언어의 구조를 익힌다고 한다. 그래서 의미는 없되 문법적으로 틀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아빠, 밖에 비가 내려'라는 기본 구문만 익히면 '아빠, 밖에 별이 내려''밖에 꿈이 내려'라는 식으로 자유롭게 표현을 하게 되고,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이다. 아기는 말의 조립공 같다.

◈정치인도 말만드는 기계

어저께는 녀석이 저녁 늦게 들어오는 나를 보더니

"아빠는 곰팡이야"

하고 일성을 내쏘았다. 내가 뜨악해 있으니 아내가 낮에 식방에 곰팡이가 슬었는걸 보더니 그러는 모양이라고 웃는다. 요즘 들어 자기랑 자주 놀아주지 않아 토라진 듯했다. 내가 재미난 표현이다 싶어 아기를 껴안고 되물었다.

"경중아, 곰팡이가 뭔지 알아?"

네살배기 녀석이 하는말

"어, 곰팡이가 말을 하네"

녀석의 반짝이는 재치에 기가 막혔다. 물론 녀석은 자기가 재치있는 표현을 했는지 알리가 없다. 아기의 입은 말을 만드는 성능좋은 기계와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말을 만드는 기계라면 떠오르는게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걸리버 여행기'를 보면 거기에 말을 만드는 기계가 나온다. 바둑판처럼 생긴 그 네모난 기계는 언어의 문법적 골격위에 무수한 단어들을 조립하고 반복하여 문장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우리에게 동화로 알려진 '걸리버 여행기'는 원래 풍자소설로 18세기 영국의 귀족사회를 통렬히 조롱한 작품이다.

◈'그분들'말은 관심권 밖

말을 만드는 기계를 또 하나 꼽자면 정치인의 입이 아닐까 싶다. 한창 성명전을 벌일 때 각당 대변인들의 입을 보면 정말이지 '말을 만드는 기계'가 절로 떠오른다. 개별 의원들의 입도 그에 못잖은데 그분들의 말을 차분히 경청해 보면, 정확한 문법적 구조 위에서 몇몇 단어들이 조립, 반복되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희한하게도 말을 배우는 아기들의 언어활동 방식과 아주 흡사하다. 단지 아기는 "아빠는 곰팡이야"하고, 정치인은 "김대통령은 곰팡입니다"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하나는 웃음거리고, 하나는 속기록에 옮겨진다는 차이도 있다.

하여간 한 야당의원이 "김대통령은 곰팡입니다"라는 말에서 좀 색다른 조립을 했다고 온나라가 벌써 한달째 시끌시끌하다. 국감이니 특검제니 당략이니 하며 온갖 말들이 난무한다. 언론들도 그 말들을 분석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별로 그 분들의 입에만 관심을 기울일 까닭이 없을 듯하다. 당장 엄마 손을 잡고 길을 가는 아기를 을러보면 우리는 그 정도의 뛰어난 말솜씨를 얼마든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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