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사회는 전문가가 존중되는 사회를 일컫는다. 사회 각 분야에서 전문가가 존중되는 풍토가 확산되어 간다면 그 사회는 필경 선진화를 이룩하게 되리라. 어느 분야에서나 전문가는 함부로 양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 분야에서 한 전문가가 나타나려면 천부적 재능은 물론 오랜 세월 동안 각고 연마를 바친 다음에라야만 비로소 가능한 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전문가가 많은 사회는 문화적 전통이 깊은 사회다. 왜냐하면 한 사회가 발전하려면 인재가 많아야 할 것이려니와 전문가야 말로 다름아닌 바로 그 인재이니 말이다. 따라서 문화를 크게 꽃 피워 나가려면 반드시 많은 전문가들이 보다 개성적이고 전문적인 창조활동에 참여할 수가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학문은 학자에게, 건축은 건축가에게, 문학예술은 문학예술가에게, 혹은 양복은 재단사에게, 구두는 제화공에게, 용접은 용접공에게 맡겨져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노릇이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자연스레 조성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문화의 창조는 도저히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지난 시절, 군사문화의 잔재에 속하는 것이지만 경주의 남산 기슭에 새로 새워진 통일전을 살펴보자. 통일전은 비록 시멘트로 지어진 건물이긴 하나, 그래도 지붕을 비롯한 전체 구조는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둥들이 하나같이 달걀색(베이지색)으로 칠해져 있다. 왜 그렇게 했을까?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물의 기둥 빛깔은 반드시 붉은 색(팥죽색)으로 칠해져 있다. 그것은 아마 붉은 색이 액운을 물리친다는 민간신앙에 의한 전승인지는 알수 없으되, 하여간 대궐과 사찰과 열녀문, 혹은 충효각의 기둥들도 모두 그렇지 않은가. 실제로 요즘도 동지팥죽 때는 액귀를 물리치고 수복강녕을 기원하기 위해 붉은 팥죽물을 집안의 벽이나 기둥에 뿌리는 풍속이 남아 있다. 일설에는 처용설화에 기원을 둔 풍습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통일전 또한 마땅히 민족고유의 붉은 색으로 단장이 되어야 할 터인데 난데없이 서구적 색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필경 모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듣건대 그것은 당시의 고위층이 그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 문득 한 마디 던진 것 때문에 온통 달걀색 천지가 돼버렸다고 한다. 하긴 자세히 살펴보면 비단 통일전 뿐만 아니다. 신통하게도 그 시절에 세워진 공공건축물은 어느 곳의 것이나 하나같이 기둥은 물론 벽면까지 모조리 달걀색으로 단장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만일 그 고위층이 보다 문화적 교양과 지성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면 결코 그런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건축물은 전적으로 그 방면의 전문가에게 맡겨져야 한다는 상식을 그는 왜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혹시 그는 정치적 지위에 따라 자신의 모든 면이 무소불위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물론 이것은 하나의 사소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전문가가 아닌 강자의 지위와 횡포로 인해 빚어지는 시행착오가 한두 가지였는가. 한때 고위층의 지시라면 사회 각분야가 경천동지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지금은 우스갯감이 되고 말았지만,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밤나무단지 조성이나 해바라기 단지 조성도 그 한 예가 아닌가.
10월은 문화의 달이다. 한글이 창제된 것도 이 달이고, 또한 워낙 독서와 사색의 계절이기도 하자. 그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그 고장의 역사성과 문화적 전통에 따라 고유의 문화제가 개최되는 것도 10월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물론 어느 고장에서나 이 달 중에는 각종 문화제가 열린다. 해마다 계승된 문화행사이다. 그러나 어쩐지 어느 고장의 문화제나 늘 알맹이가 빠진 듯한, 형식적이고 일과성적인 문화행사인 듯한 감이 없지 않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마 문화예술인들이 주축이 되지 못하고 항상 행정당국의 전시행정에 꿰맞춰 온 탓일지도 모른다. 문화예술계 쪽보다는 다방면의 인사들이 모여 다수결로 결정해버리는 문화제인 것이다. 그런 발상으로는 아무리 지방자치화시대라고 해도 문화의 자치와는 연목구어(緣木求魚)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제 전반에 걸쳐 그 방면의 전문가들이 시간을 두고 심도있는 논의를 거쳐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문화행사의 틀을 짜는 것이 이상적이다. 물론 다수보다는 소수 정예의 전문가가 존중되는 풍토라면 말이다.일반론이지만 고장마다 문화제를 시행하기에만 급급해서는 별로 의의가 없다. 적어도 그 문화제의 특성이 구체적인 행사를 통해 부각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지방의 특성을 알리는 역사성과 전통성을 발굴하고 전승하려는 의도가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역사적 전통의 발굴과 계승은 모든 문화제의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곧 새로운 문화의 창조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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